대한한의사협회(회장 김정곤 · 이하 한의협)가 내전에 휩싸였다.
현재 한의협은 회관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의사평회원협의회(회장 국승표 · 이하 평의회)와 격렬한 마찰을 빚고 있다. 한약 처방권을 두고, 협회가 제 역할을 못했다는 것이 핵심 쟁점이다.
문제의 발단은 최근 열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날 의결된 첩약의보 시범실시 방안 중에는 한약 조제 시 ‘약사’와 ‘한약사’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평의회는 강력히 반발했다. 법적으로 현재 진단권이 없는 약사와 한약사의 진단권을 인정하고, 심지어 건강보험급여 혜택까지 받게 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지난 28일 평의회 회원들은 한의사협회 회관을 기습 점거했다. 현재까지 점거는 풀리지 않고 있으며, 3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출입부터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나서야 건물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입구와 복도 곳곳에 책상과 의자가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바닥에는 밤샘 농성을 벌인 평의회 회원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평의회는 한의협 김정곤 회장을 비롯한 임원 및 시도지부장 전원이 사퇴할 때까지 점거를 풀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특히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대화는 커녕 오히려 고발하겠다는 한의협 태도에 강력 반발했다.
이에 대해 한의협은 직접 고소한 것이 아니라 검찰에서 인지 수사를 한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단순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참의료실천연합 회장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부터가 한의협이 직접 고소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평의회측 주장이다.
국승표 회장은 “천연물신약 및 개인비리 건 등으로 인해 회원들의 현 집행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며 “다른 조건은 다 필요 없이 무조건 집행부 사퇴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지난 30일까지 약 4000명의 회원이 팩스로 위임장을 보내오면서 평의회의 이번 점거 농성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지방 회원들 중에는 서울로 직접 올라와 사비로 마실 것과 담요 등을 챙겨주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하기도 했다.
국승표 회장은 “한의대 재학 중인 학생도 방문에 현 사태에 대해 우려감을 표했다”며 “민의가 이런 상황인데도 회원들과의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번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임한 김정곤 회장은 자격이 없다”고 날을 세웠다.
협회장실은 일부 회원이 투척한 날달걀과 오물로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벽 한 켠에는 ‘식약청의 X’라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붉은 글씨로 도배가 됐다. 서류철과 명함도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평의회는 “약사법 62조 16항에 의해 약사는 질병에 대한 진단이 불가능하며 상병을 입력할 수 없다”며 “이번 합의안은 약사법 시행규칙을 위반한 합의로써 원천무효”라는 입장이다.
건물 입구에서 만난 점거 농성 참가자들은 “김정곤 회장은 남자답게 물러나길 바란다”, “그냥 가만있는 게 한의계를 돕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직 사태는 진행형이다. 30일 부로 전자차트 콜센트 운영 등 시급한 사무국 업무는 재개됐으나, 단절된 양측 대화의 물꼬 트기는 요원해 보인다.
국승표 회장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현 집행부 전원사퇴 이전에 점거를 풀 계획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며 “김정곤 회장은 회원들의 뜻을 알았으면 자진사퇴하고, 더 이상 한의계를 혼란에 빠트리지 말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한의협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결 내용에 대해 지난 26일 환영의 입장을 밝혔을 뿐, 이번 점거 시위와 관련해서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