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굴곡진 현대사를 뒤로하고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우리나라 경제를 흔히 한강의 기적이란 말로 표현하고 한다. 의학 역시 마찬가지다. 100년 전, 놀라움과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과학으로서의 의학을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달콤한 열매는 오롯이 임상현장에서 활동 중인 의사들에게로만 집중됐을 뿐, 의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기초의학은 홀대와 외면 속에 더딘 발걸음만 간신히 옮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기초의학. 가뜩이나 어려운 여건 속에 지방이라 더욱 서러움을 몸소 느껴야 하는 지방의대의 기초의학교실을 데일리메디가 찾아봤다.[편집자주] 초여름 날씨가 한껏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지방의 기초의학교실의 현주소를 알아보기 위해 영남대학교를 찾았다. 영남대학교 기초의과학연구센터장(MRC)으로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의 김재룡 교수
[사진]는 대뜸 이 말부터 꺼냈다. 기초의학이란 외로운 길속에 지방이라 더 어려운 심정을 아느냐고.
지방이라 더 서러운 기초의학교실그도 그럴 것이 여러 지원 속에 사정이 비교적 나은 편이라고 하는 MRC 소속 석·박사 과정의 조교 숫자만 봐도 의사출신은 56명인데 반해 타 과 출신 조교들은 102명으로 2배 가까이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2007년도 국회 제출 자료)
이러한 사정은 영남대학교 기초의학교실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김 교수가 맡고 있는 생화학·분자생물학교실도 기초의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의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영남대학교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만이 학교에 남아 기초의학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현하자, 김 교수는 오히려 이것이 요즘의 현실로 거스르기 힘든 흐름인 냥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초의학교실에 대한 선호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모두들 임상의학에 뜻을 두고 있다 보니 한 해 졸업생 중 그나마 전공자를 찾는 곳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정도죠. 그나마 서울의 유명 대학, 큰 병원은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기초의학을 어렵싸리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젊은 학자들이 모두들 서울로 발길을 돌리기 일쑤입니다.”
‘정부가 당초 의학전문대학원을 추진할 당시만 해도 기초의학 전공자가 더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완전한 실패”라는 설명도 김 교수는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의대와 의전원을 병행하고 있는 영남대 역시 이러한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며 의전원 체제 속에서 기초의학이 더욱 외면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학생들의 수업 분위기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의대와 의전원 학생이 한 데 섞여 교과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영남대의 한 강의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들어간 기초과목 수업에는 얼핏 보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집중하고 있는 듯해도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안내를 자처한 김 교수는 “임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수업이 아니라면 학생들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학생 때의 이러한 분위기는 의대졸업 후 진로를 결정할 때도 고스란히 이어지는 게 당연지사”라며 허탈한 웃음을 내보였다.
주무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 역시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뚜렷한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교과부 박항식 기초연구정책관은 최근 열린 기초의학학술대회 자리에서 “기초의과학 전공 실적이 저조하다. 양성된 신진 기초의과학자의 진로 및 연구력 강화를 위한 지원도 열악하다”며 개인연구비 확대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지만, 김 교수의 이날 설명을 듣다 보면 이 역시 턱없이 부족한 지원일 수밖에 없다. 기초의학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걷어내기에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병리 전공의들 “우리는 임상과”강의실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영남대에서 귀하디 귀한 의사 출신 기초의학 전공자들을 만나기 위해 병리학 교실로 발길을 이어갔다. 대다수가 걷지 않으려는 기초의학을, 그것도 지방이란 이중고를 넘기고 있는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그들과의 대화는 우리나라 기초의학의, 지방의 기초의학교실의 희망 보다는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기에 봉착했음을 알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병리학교실을 굳이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임상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병원에서 병리학 전공의들에게 요구하는 바도 그렇고 저희 생각도 임상의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봅니다.”
영남대의대 병리학교실에는 현재 3명의 전공의가 수련을 받고 있다. 위로부터 4년차 1명, 3년차 1명과 올해 들어온 1년차 1명이 전부다. 그나마 2년차는 전공의가 없어 이들 3명이 병원에서 의뢰하는 병리학적 검사를 모두 도맡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영남대 직제상 병리학교실이 기초의학교실로 분류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임상의’로 소개하는데 거리낌 없는 모습이었다.
한 전공의는 “병리학 교실을 지원한 것도 기초의학자로서의 미래보다는 임상의로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들어온 것”이라며 “지금도 기초의학자로서의 어려움보다는 수가와 같이 임상의들에게 민감한 부분이 현실적으로 더 와 닿는 문제”라고 말했다.
애초 기초의학이 아닌 임상과로 병리학교실로 택했다는 말로, 최근 젊은 의사들에게 있어 기초의학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나마 지금과 같이 병리학 교실에 전공의가 있는 것만 해도 지난 2005년 이전 10년간 단 한명의 전공의도 없을 때와 비교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상이긴 하지만 연구원으로서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갖추고 학교에 남아 안정적인 삶의 기회가 제공된다면 기초의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까 물었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기초의학의 매력은 크지 않다는 것.
전문의 자격을 따고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전임의는 “의대에 진학 전 대부분이 임상의사로서의 삶을 꿈꾸고 들어와 대학에서 ‘특별한’ 계기가 있는 소수만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게 현실”이라며 “조건이 달라진다고 해서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공의 역시 기초의학의 미래와 같이 거대 담론을 차치하고, 단순히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면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게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그는 “임상과 기초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선택의 폭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임상을 전공한 사람은 앞으로 대학에 남아 연구를 하든, 개원을 하든 여러 삶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지만 기초를 전공하면 연구원 이외의 다른 삶이 존재하지 않지 않느냐”고 오히려 기자에게 되물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자신의 미래를 확정짓기에는 아직은 배울 것도, 경험할 것도 많은데다, 이후 연구자로서의 삶을 선택해도 늦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다시 김재룡 교수를 찾아 학생들이, 전공의들이 ‘기초의학’에서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말을 전했다. 해법은 없을까. 김 교수는 “학문에서 있어서도 유행이란 게 있어 어느 때는 이쪽이 바람을 일으키다, 다음에는 저쪽이 일어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다”면서도 “다만 지금은 그러한 바람을 일으킬만한 요소가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기초의학자로서 삶도 매력 있음을 제시해야"결국엔 기초의학자로서의 삶이 임상의학자로서의 삶과는 다른 매력을 충분히 제시하고, 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게 급선무라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정부와 병원, 대학의 절대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선 그는 “우선 정부가 기초의과학자 양성의 중요성을 좀 더 인식했으면 한다”며 지원을 부탁했다.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진로에 대한 고민이라면, 이들이 대학에서 교수로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정책적, 재정적 지원책이 제도로 남는 게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대학과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김 교수는 봤다. 지방이라면 더더욱 기초의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란다. 그는 “기초와 임상을 전공하는 의사들 간의 대우 차이를 줄이기 위해선 대학과 병원이 지원을 늘려야 한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들이 거둔 의학적 성과가 곧 우수 인재 확보와 지방병원의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고민들, 비단 영남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의대 졸업생의 99%가 임상과를 지원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나마 남은 1%도 서울로 몰리고 있는 일들이 지방에서는 계속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러한 고민들을 안고 가야하는 것일까. 김 교수가 말하는 ‘바람’이 불면서 우리의학의 백년대계를 다시 그려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여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