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하] “화이자, 모더나 백신은 바이오 기술과 나노 기술의 융합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인간이 발명한 모든 기술이 융합하고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의과학 분야다.” “병원에서 연구하는 의사가 아니라 연구 현장에 들어갈 의사들이 필요하다. 앞으로 무엇이 생길지 예측하고 기존에 없는 기술을 만드는 인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의사과학자’ 1호로 불리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과 김하일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학과장은 의사과학자를 이 같이 소개했다. 백신, 치료제, 디지털 치료 기술 등 새 영역을 주도할 새로운 의사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의사이자 과학자인 인재 양성을 위해 의학계 뿐 아니라 과학기술계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면서 인력 양성 주체에 관한 논의도 뜨거워지고 있다. 의대 정원 문제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학·의료계는 양성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과학기술특성화대학들은 탄탄한 연구 환경을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연구중심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배출된 의사과학자가 다시 임상으로 복귀하지 않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양측의 공통 고민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협의회를 가동한 2022년 2월부터 약 1년이 지난 현 시점, 국내 의사과학자를 키우기 위한 각계 움직임을 정리해봤다.
지난 2019년부터 시행된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 사업이 성과를 내고 있다. 전공의 대상 시범사업, 전일제 박사학위 과정, 의과학자 학부과정 등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의대 졸업생 99% 이상이 임상을 택하던 이전과 달리 매년 110명 내외(3~4%)가 의사과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기존 의대가 아닌 새로운 곳에서 의사과학자를 양성코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국내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이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해외의 경우 미국 칼 일리노이 공대는 세계 최초 공학 기반 의대를 설립해 공학 원리를 적용한 의학 교육을 시행 중이며 싱가포르 국립대학도 기존 의대 운영에 더해 미국 듀크대학과 연계해 연구 프로젝트 중심 의대를 신설했다.
카이스트·포스텍은 그동안 의료·의학계의 경계를 의식하며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했으나, 정부와 손발이 맞으면서 속도를 내고 있다.
카이스트 → ‘과학기술의전원’ 전환 탄력
우선 카이스트는 현재 운영 중인 의과학대학원을 오는 2026년 ‘과학기술의전원’으로 전환시킬 계획이다.
이 의전원은 의학집중교육 3년 + 융합의학교육 1년 + 박사과정 4년의 커리큘럼을 적용한다.
금년 1월, 정부는 카이스트를 타 과학기술원들과 함께 공공기관에서 제외했다.
교육·연구기관으로서의 자율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게 된 것인데, 카이스트의 이 같은 계획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 주목되는 이유다.
카이스트 관계자는 “앞으로 추진할 사안은 한국과학기술원법을 따르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협의를 해야한다”면서도 “과학기술의전원 설립은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학문적 수요를 충족시키고 글로벌 대학으로 도약한다는 기조를 유지하며 정부·의료계와 논의할 예정”이라며 “임상 의사들과의 갈등 없이 의사과학자를 키울 수 있길 바란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카이스트의 이 같은 의지는 최근 학위 수여식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금년 2월, 3년 만에 졸업생 전체가 참석한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강단에 오른 인물이 의사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방사성종양학과 전문의 길을 택했다가 임상 현장에서 환자를 잃은 아픔을 겪고 인류 난제 극복을 위해 의사과학자가 된 차유진 박사(바이오및뇌공학과)였다.
앞서 지난해 말에는 안철수 의원, 나군호 네이버헬스케어연구소 소장(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겸임교수) 및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측을 초청해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국가 전략 국회 대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분위기를 주도했다.
포스텍, 지자체·지역 의료계와 합심
포스텍은 지난해 ‘바이오헬스 도시’로의 도약을 천명한 포항시 뿐 아니라 경상북도, 포항 6개 병원 등 지역 의료계와도 뜻이 맞으면서 추진 사업은 순항 중이다.
올해 3월 연구중심의대를 의과학대학원 형태로 개원하는데, 카이스트 구상과 같이 향후 이를 의사면허 취득이 가능한 기관으로 만드는 게 포스텍의 목표다.
포스텍의 연구중심의대는 세계 최초로 공학과 의학을 융합한 일리노이 의대 커리큘럼처럼 MD-PhD 8년 복합학위 과정(2+4+2)으로 운영된다. 오는 2028년까지는 500병상 규모 스마트병원도 설립, 운영할 계획이다.
근래에는 의대 설립 인가, 의대 정원 확대 결정에 대한 최종 권한을 각각 가진 정부 부처 장관이 최근 두 번이나 포스텍을 찾으면서 청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우수한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서는 임상과 기초과학, 공학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2월 포스텍을 찾은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포항시와 포스텍이 대한민국 인재 양성전략의 모델로 성장할 수 있도록 소통·지원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포스텍의 자신감은 지난해 말 열린 ‘의대교육과정 개편을 통한 의사과학자 양성 방안 마련 국회토론회’에서도 확인됐다.
당시 김철홍 포스텍 창의IT융합공학과 교수는 “기존 의대교육 과정 개편을 통한 방법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형태의 양성 시도가 필요하다”며 “이공계적 시각으로 임상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사업화 성공을 이끄는 의사과학자를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그는 “과기특성화대학에서 인공지능·빅데이터 등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최첨단 의료기기 및 신약, 재생의학, 의료용 신소재 개발 역량을 갖춘 의사과학자를 키울 수 있다”고 피력했다.
의학계 “의사과학자 양성, 의대가 주도해야”
카이스트·포스텍은 분주한 행보를 보이면서도 간간이 “연구중심 의대 교육 과정에서 전공의 수련은 없다. 졸업한 의사과학자들이 임상으로 복귀하는 현상을 막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의료·의학계 우려를 의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계는 “의사과학자는 의대가 키우겠다”고 선을 그었다. 카이스트·포스텍 의전원 뿐 아니라 각 지자체가 공공의대 설립에 열을 올리던 시점이긴 했다.
지난해 말 KAMC 학술대회에서 신찬수 KAMC 이사장은 “과기특성화대의 의대 설립 움직임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이제는 의대 중심으로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서 의과학대학원 체제는 기존 의대들과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그러나 과기특성화대들이 의사면허 취득이 가능한 의전원 체제를 추진하자 이같이 선을 그었다.
정지태 대한의학회 회장도 “국가 의사 양성 의지에 모순이 있다”며 “국가가 군대에서 필요한 전문의, 군의관 양성에 세금은 안 쓰면서 수많은 의사 양성만이 국민 건강 향상을 위한 지름길인 양 질주하는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의학 교육이 변화해야 하는데 제도적 지원은 멈춰 있고, 그러면서 미래 먹거리로 ‘의생명’을 강조하고 나서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왕규창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원장은 “과학고 졸업생이 의대에 진학하면 나라에 큰 문제가 생길 것처럼 말하면서 과기특성화대에 실습 병원없이 의전원을 만들겠다는 움직임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며 “의대정원 문제 본질을 외면하고 일단 늘리고 보자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고 일침했다.
의대과정 통합 6년제 추진·기초학문 육성 대안…총론 ‘공감’ 각론 ‘이견
의학계는 의대 교육과정을 통합 6년제로 개편해 기초의학·연구를 접할 기회를 늘리고, 기초학문을 보호·육성함으로써 의사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신찬수 KAMC 이사장은 “기초의학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연구중심 병원’ 사업보다는 오히려 ‘연구중심 의대’ 사업을 추진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원은 진료를 보고 헬스케어 사업을 하는 곳이다. 노벨상 등을 바라보는 연구는 대학이 하는 게 적절하다”며 “역량과 여건을 갖춘 대학을 선택·집중해 육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기초의학은 밤새 실험해도 좋은 논문이 나오기 어렵고, 연봉도 적으니 학생들이 기초의학 분야 선택을 주저한다”며 “교수들조차도 연구비를 따내기 너무 어렵다. 정부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왕규창 의학한림원장은 의학교육 과정에서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는 유연성을 발휘해 기존에 부진했던 영역에 몰입하는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왕 원장은 “기초의학을 보호·육성 학문으로 지정해야 한다”며 “연구기반 강화를 위해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해 인접 학문을 이해하고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의대 교육 개편에 대한 시각은 아직까지 엇갈리고 있다.
안덕선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은 지난해 말 열린 ‘의대교육과정 개편을 통한 의사과학자 양성 방안 마련’ 토론회에서 “학생을 구분하지 말고 진료 역량에 더해 연구 역량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과학자는 주어진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 기저에 있는 문제를 인식하고 과학적 방법론 기반하에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역량을 갖춘 의사라는 것이다.
안 원장은 “고교 성적 상위 0.1%~1% 의대생들을 입학 단계부터 의사와 의사과학자로 구분해 대부분을 전통 진료 의사로 양성하고 소수만 의사과학자로 양성하는 것이 적합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 국내 한 의대는 정규 교육과정에 의학연구를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전체 5% 비중으로 추가한 후 학생들이 해외 저널에 제 1저자로 등재되는 건수가 연간 40편을 상회했다.
이와 관련, 안 원장은 “의대 학생들 소양이 우수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면 우리가 원하는 의사과학자 양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측은 의대생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기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지만, 6년제 전환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의대생이 기초의학 및 연구 기회를 포함해 타 학문 분야를 접할 기회를 원천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강민구 대전협 회장은 “그나마 의예과 기간을 통해 임상의사 외 의사과학자 등 다른 진로에 대해 꿈 꿀 여지가 있었는데 기존 교육과정의 과도한 학업 부담 등으로 해당 진로를 포기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의사들은 자발적으로 수학, 전기공학, 컴퓨터공학 등 다양한 학문 공부를 이어가는 분위기이며 일부는 산업계에서도 눈에 띄게 활약 중이기도 하다.
강 회장은 과기특성화대에 의대를 신설하는 아이디어와 비교하면서 “복수학위 취득을 허용하면 기존 종합대학 인프라를 활용하고 의대생의 자발적 선택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 취지를 살리면서 비용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