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1]국내 의료계에 ‘노환규’ 만큼 논란적 인물도 드물다. 대학병원 봉직의와 개인병원 원장, 경영자, 의사단체 대표에 이르기까지 이력 역시 눈에 띈다.
이 과정에서 줄곧 ‘왜곡된 의료서비스 구조 개혁’을 외치던 그는 급기야 지난해 3월 말 예상을 깨고 압도적 지지로 대한의사협회 회장 선거 당선자에 이름을 올렸으며 5월 취임했다.
그의 파격 행보에는 언제나 기대와 우려의 시선이 극명하게 나뉘어 쫓아다녔고, 취임 1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의료계 이단아에서 의협회장 등극, 그 후 1년까지. 노환규 회장의 행보를 담았다.
대한의사협회 노환규 회장은 어릴 적 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국내 최고 사학 중 하나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이른바 엄친아로 성장했다.
노 회장의 파격 행보는 의대 시절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민주화 시위를 하는 대규모 행렬 사이로 홀로 오토바이를 타고 돌진했다는 일화는 그의 성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승부사 기질 다분
*교수직 버리고 새 분야 개척 눈을 뜨다
오토바이와 차를 좋아하고, 승부와 도전을 즐겼던, 아니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흉부외과 의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1995년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외과 전임의로 근무한 후 1996년 아주대병원으로 적을 옮겨 1999년까지 흉부외과 조교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순탄한 삶이 예고되는 교수직을 과감히 내려놓는다. 정보화 시대 속 의료서비스 사업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는 연세대 정보대학원(2001년)과 경희대 행정대학원(2009년)에서 정보학 및 리더십 고위과정을 수료했다. 이 같은 그의 이력은 훗날 건강관리 서비스와 의료인 커뮤니티 운영 회사 경영으로 이어졌다.
그는 1999년 에임메드라는 건강관리 서비스 업체를 만들어 경영자라는 새 옷을 입었다. 이후 2006년~2010년 AK존스의원에서 진료를 보는 와중에도 핸즈앤브레인 회사를 통해 의료인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경영 업무를 이어갔다.사업을 하면서도 어려울수록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는 것이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얘기다.
*전의총 대표 활동으로 '강성 이미지' 부각
*변화 원하는 의사들 ‘전폭적 지지’
그가 대한의사협회 회장직에 오르는 주요 분기점이 됐던 전국의사총연합(이하 전의총)에서의 본격적인 활동도 이쯤이다. 2009년 9월 창립총회를 가진 전의총은 △심평원 실사 △원격의료 △의약분업 △일반약 슈퍼판매 등 의료계 이슈들에 대해 잇따라 강도 높게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전의총 활동을 하면서 의료계 첨예한 사안에 대해 정부와 당시 의사협회 집행부, 제약업계와 대립각을 세웠다. 리베이트 사안 및 경만호 전 의협회장과의 마찰 등이 대표적이다.
리베이트 쌍벌제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 한미약품은 일부 의사들로부터 불매운동의 타깃이 됐고, 여론은 걷잡을 수 없게 번졌다. 결국 한미약품 임선민 사장은 전의총 사무실을 전격 방문해 “의료계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았다”며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당시 노환규 회장은 “의료계 발전 없이는 제약산업 발전도 없다는 사실을 제약기업들이 깨닫고 의료계 발전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경만호 집행부와의 골도 깊어졌다. 각종 법적 다툼이나 계란 투척 등은 의료계 안팎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 의료계 인사는 “전의총 대표 시절 노환규의 행보에 우려가 컸다”면서도 “젊은 의사들이나 일부 의료계 인사들에게 개혁의 모습으로 어필했던 것 같다. 어떠한 형태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여론”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신구세대 갈등으로 비쳐졌던 당시 의료계에서 젊은 의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인터넷 의사 커뮤니티 ‘닥터플라자(닥플)’였다. 노환규를 중심으로 한 여론은 닥플을 시발점으로 결속력을 다졌으며, 노환규라는 인물을 의협 회장 선거 출마로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말 많은 회장선거 '출마'…전혀 예상 못한 ‘압승’
*“자존심 지킬 수 있는 의료 환경 구축” 약속
2011년 말 그는 대한의사협회 회장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신뢰할 수 있는 후보가 없으며 의협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출마의 변으로 내세웠다. ‘새로운 리더십’과 ‘선동가’라는 동전의 양면 이미지를 그대로 손에 쥔 채 의협 회장 선거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총 1574명의 선거인단 중 90%가 넘는 1430명이 참여한 제37대 대한의사협회장 선거에서 그는 58.7%(839표)를 얻었다. 의료계에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압승이었다.
노환규 회장은 “선거가 많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아래 치러졌지만 저의 당선에 일부에서는 당황해하거나 심지어 분노하는 분들도 있을 것으로 안다”며 “의사가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켜나갈 수 있는 의료환경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당선 3일 만에 회원권리정지 처분을 받아 당선 무효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그는 회장 선거 후보등록 전(前) 계란 투척 등으로 의협 중앙윤리위원회에 징계 제소를 당했고, 윤리위는 청문회 등을 거쳐 징계 처분을 확정했다.
그는 혼란이 거듭되자 “취지가 옳다 해도 부적절한 행동에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것은 상식이자 규범”이라며 회원과 경만호 전 회장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경 전 회장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화해모드로 선회했다.
지역과 일부 개원의 단체에서도 “과반수 이상 득표를 한 당선자의 징계를 철회하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지난해 5월 그는 제37대 대한의사협회 회장으로 정식 취임할 수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
*“갈등 아닌 소통, 그리고 하나로 통합 원하는 의사들 많아”
변영우 의협 대의원회 의장은 노환규 회장을 ‘의협 100년사에 특출난 인물’이라 평했다. 의료계에서 비주류였던 그가 의협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변화를 바랐던 여론과 낯설지만 과감한 결단성 등 매력적이었던 리더 캐릭터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지면서 가능했다.
의협 회장으로서 1년이란 짧은 임기를 이제 막 지났기에 평가는 이르다. 그러나 의사들이 원하고 바라는 의협은 분명 존재한다.
한 의료계 인사는 “그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열렬한 지지자이거나 등진 자로 구분되는 분위기”라면서 “의협에서 추진하는 모든 사업에는 회원들의 이해와 설득 작업이 중요하다. 소통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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