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재앙(災殃) 대한민국 '메르스'
중동발 감염병에 사회적 대혼란·국가 이미지 급락 등 초토화
2015.07.10 11:45 댓글쓰기

이쯤 되면 ‘재앙’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겠다. 오일머니의 꿈에 부풀었던 대한민국 의료는 바로 그 곳 모래바람을 타고 건너 온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에 초토화됐다. 크기 10~1000나노미터에 불과한 하등생물 바이러스는 한국의료의 면역체계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특히 메르스 확산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함에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공분했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뜻의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를 ‘무능한 정부가 더 무섭다’며 무정맹어호(無政猛於虎)로 바꾼 일침에 공감가는 요즘이다.

 

무모한 확신
메르스 사태의 발단은 지난 5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번 환자가 카타르를 거쳐 인천공항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국난(國難)의 진원지가 될 것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 환자는 귀국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고열과 기침 등의 증상이 발현돼 병원을 찾았다. 여러 동네의원을 거쳐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했고, 호전이 없자 삼성서울병원으로 전원했다.


의료진은 환자의 바레인 경유 사실을 확인하고 질병관리본부에 메르스 검사를 요청했고, 20일 마침내 양성 반응이 나왔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찾은지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1번 환자는 국가지정격리병원인 국립중앙의료원으로 보내졌고, 담당 의료진과 일부 접촉자를 격리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메르스 환자를 처음 발견했다는 사실을 병원 응급실 의료진들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1번 환자 확진 후 역학조사관이 그의 행적을 추적했다. 평택성모병원에서 3일이나 입원했고, 그 곳에 40여 명의 환자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당국은 동요치 않았다.


보건당국은 당시 “환자 가족과 의료진을 즉각 격리하는 등 대응 조치를 선제적으로 강화했다”며 메르스 확산 가능성을 낮게 전망했다.


그러나 수퍼전파자인 14번 환자 확진 이후 감염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결국 안일한 판단으로 ‘방역 골든타임’을 놓친 셈이다.


보건당국의 이 같은 패착은 매뉴얼에만 매달린 탓이 컸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발견된 메르스는 아직 감염 경로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1시간 이상, 2m 이내 밀접접촉 시 감염된다’는 매뉴얼을 기계적으로 적용했고, 그 지침이 화를 키웠다.

 

자초한 불신
처음부터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메르스’라는 생소한 바이러스 출현 초기 국민들은 보건당국의 판단과 조치를 믿었다.


보건당국 역시 철저한 방역체계와 감염병 관리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만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상황은 정부 발표와 상이하게 전개됐다. 감염자는 날로 늘어났고, 사망자까지 발생하며 국민들은 동요했다.


일각에서는 SNS를 통해 메르스 발생 지역, 의료기관 이름 등이 번져갔지만 정부는 ‘괴담’이라고 치부하며 적극적인 단속 방침으로 엄포를 놨다.


그러나 메르스 병원명 공개 불가 방침을 고수하던 보건당국은 지난 6월5일 갑작스레 입장을 바꿔 진원지였던 평택성모병원을 공개했고, 이틀 후 관련 의료기관을 모두 오픈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의료기관 명단 공개에 따른 부작용보다 국민 불안 해소와 메르스 사태 조기 종식이 더 급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불신을 자초한 정부의 말 바꾸기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문형표 복지부장관은 지난 2일 “비말을 통해 감염이 되는 만큼 동일 장소에 있었더라도 감염 우려는 낮다”고 말했다. 매뉴얼 대로 2m 이내가 아니라면 감염 걱정은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3일 후 “간접 접촉자도 관리 대상”이라고 말을 바꿨다. 문 장관은 “밀접 접촉자뿐만 아니라 간접 접촉자까지도 모두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3차 감염에 대한 입장도 오락가락했다.
보건당국은 메르스 발생 초기 “3차 감염자가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고 지역사회로의 전파는 없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3차에 이어 4차 감염자까지 나오면서 허언(虛言) 임이 드러났다.


정부부처 간의 엇박자 행보도 국민들의 불신을 키운 요인 중 하나다.
메르스 확산 우려가 커지자 교육부는 추가 감염 방지를 위해 휴업이 필요하다며 전국 시도교육청에 관련 공문을 내려보냈다.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각 학교 및 지역 상황에 따라 학교장이 교육청 및 보건당국과 긴밀히 협조해 적극적인 메르스 예방 차원에서 휴업을 결정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입장이 달랐다. 복지부 관계자는 “일부러 휴업할 필요는 없다. 의학적으로도 맞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상반된 견해를 내놨다.


결국 이번 메르스 사태로 3000곳 이상의 학교가 휴업을 실시했다.

 

냉철한 의심
메르스 사태는 초기의 방역 공백이 결정적이었다. 보건당국은 신종 감염병 대응에 필요한 지휘 체계도, 매뉴얼도,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보건당국 역시 과오를 시인하고,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얻는 교훈을 토대로 보다 체계적인 감염병 관리대책을 마련했다.


신종 감염병 발생시 역학조사관에게 의료기관 즉각 폐쇄권을 부여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토록 했다.


또 감염병 확진자 또는 의심자 등이 감염경로 등 확인에 필요한 사실을 거짓 진술하면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일명 ‘메르스법’으로 불리는 감염병예방법 개정안은 일사천리로 국회를 통과했다.


여기에 복지부는 메르스 유행을 계기로 감염병 관리 및 예방에 관한 제도 개선을 위해 건강보험 수가 개편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병원 감염관리에 대한 상시 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패널티와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한편 감염 통합진료수가 신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복지부의 방침과 계획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특히 제도 개선이라는 미명 하에 일선 의료기관들을 옥죄는 감염병 관련 시설 및 인력기준 강화 정책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사태 초기부터 제기됐다.


한 중소병원 원장은 “사후 대두되는 정책은 늘 병원들을 힘들게 한다”며 “이번 사태는 단순한 병실 구조 개선 등이 아닌 감염관리 시스템 전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당장 시행될 메르스 피해 의료기관 보상에 대해서도 벌써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의료기관 보상 필요성에는 공감을 표하지만 실질적인 보상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실제 벌써부터 정부는 ‘직접보상’과 ‘간접보상’을 두고 의료계는 물론 국회 등과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는 중이다.


한 의료재단 이사장은 “정부가 메르스 사태 진화를 위한 일선 의료기관들의 헌신과 노력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 보상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정부의 보상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지켜볼 일”이라며 “메르스로 도산 위기에 놓인 병·의원이 부지기수 임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여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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