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 핵심 역할 매력적, 체계 확립 주력”
안명옥 국립중앙의료원장
2015.03.23 00:00 댓글쓰기

“의대 시절부터 내 꿈은 공무원이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모체태아학을 세부전공한 산부인과 전문의가 미국에서 예방의학 레지던트를 다시하고 보건학 석·박사를 하며 전반적인 보건정책을 공부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평생 공동선(共同善)과 공공선(公共善)을 향한 공적 역할에 열정과 열망이 있었다. 소싯적 꿈과 초심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됨으로써 이뤄졌다. 나에게는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더욱 더 의미가 크며 소중하다.”


안명옥 신임 국립중앙의료원장이 지난해 말 의료원장으로 취임하며 한 말이다. 안 원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취득한 석·박사학위, 교수 활동, 여러 시민단체와 함께한 여성운동, 국회 여성아동 미래비전자문위원회 위원장, 제17대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 씽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 참여. 안 원장은 “이 모든 경험이 국립중앙의료원장직을 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취임 후 60여일이 지난 시점, 꿈의 자리에 서있는 안 원장을 만나봤다.


Q. 의료원장 임명을 축하드린다. 임명 후 어떻게 지냈는지


국립중앙의료원(이하 NMC)에 속해 있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내밀한 부분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사실 NMC 원장직 공고를 보고 신청을 결심한 순간부터 많은 분들에게  묻고 또 홈페이지와 기사 등을 살피며 나름의 파악을 했다. 그럼에도 의료원장으로서 실질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 구석구석 보고 있다. 가능한 많은 분들을 직접 만나려고 하다 보니 계획보다 업무 파악 기간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 몇 부서의 보고가 남아있는데 3월 초까지는 파악이 끝날 것 같다. 아주 바쁘고 즐겁게 일하고 있다.


Q.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원장직에 취임했다. 소감이 궁금한데


NMC는 대한민국 공공보건의료의 중심이자 대표기관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한 국가 보건의료의 중앙집행기관 원장을 맡게 돼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이면서도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낀다. 그런 만큼 열심히 달리려고 한다. 임기가 3년인데,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3년이 보통 사람들의 10년이 될 수도, 또 1년이 안될 수도 있다. 3년을 10년처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Q. 이력이 화려하다. NMC 원장직에 지원한 이유는


어려서부터 공공보건의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부모님은 평생 의사로 사셨지만, 아버지는 의사보다 의무공무원이라는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셨다. 공적 헌신은 어려서부터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특히 NMC가 특수법인화 된 이후 신설된 공공보건의료본부가 매력적이었다. 202개 공공의료기관을 관장하고, 더 확장시키면 254개 보건소까지 연결할 수 있다. 전체 공공보건의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열망이 여기에 오게 한 동력이자 동인이다.


Q. NMC와의 인연이 특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모와 이모부가 의사였는데 이모부는 1958년 NMC가 개원할 때부터 평생을 국립의료원에서 진료하고 원장까지 지낸 박찬무 원장이다. NMC에 이모부가 계셔서 어렸을 때부터 많이 찾아왔었다. 의대 시절, NMC에 스칸디나비아 등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이모부는 늘 나에게 그 분들과 만날 기회를 줬다. 또 산부인과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15대 원장이자 보건복지부 장관, 국회의원이셨던 주양자 선생님도 뵐 수 있었다. NMC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고 이런 분들의 영향으로 의사는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이라는 걸 꽤 많이 느끼고 살았다.


Q. NMC 원장직으로 자신의 꿈을 이뤘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정의(正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정의의 편에 서서 힘든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판사가 됐으면 하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보라색인데, 많은 분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여기지만, 나에게 보라색은 법복(法服)의 색, 정의의 색이다. 좋아하는 사람도 잔 다르크다. 이러한 가치관에 아버지가 큰 영향을 끼쳤다. 정의의 사도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키워드 중 하나가 ‘사랑’이라면 다른 하나는 ‘정의’다. 이 두 가지가 중첩돼 있는 직군이 공무원이라고 생각했다.


Q. 의사가 되고 나서 곧장 공무원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나


의대 시절 보건의료 정책을 공부하고 싶어 예방의학과를 지원했다. 그런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는 예방의학을 배울 수 없다고 받아주질 않았다. 결국 산부인과를 전공했다. 그 후 미국에서 보건학을 공부한 후 보건복지부에 찾아가 일하고 싶다고 청했는데 행정고시를 봐야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행정고시를 준비했는데 나이 제한 때문에 결국 도전하지 못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이 된 후 처음으로 내놓은 법안이 나이, 성별 등에 의한 차별 금지법이다.


 

Q.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학위를 취득했다


예방의학과의 차선책으로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를 포괄하는 산부인과를 전공했는데, 모자보건 정책에 대한 꿈은 여전했다. 그래서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가 인구 및 가족보건을 공부했다. 당시 미국은 모자보건을 넘어 가족과 인구까지 학문의 영역을 확장시킨 상태였다. 덕분에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법학 등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또 예방의학을 공부하며 재난의학까지 섭렵해 앞선 시기에 굉장히 선진화된 학문들을 배울 수 있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공부한 것이 그때는 힘들었지만 한국형 모델들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자산이 됐고, 지금 생각하면 축복의 시간이었다.


Q. 여성운동을 했다. 이유는


2000년대 초 귀국한 뒤 성폭력상담소에 직접 찾아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성민우회 등 진보와 보수를 아울렀다. 사실 성장하며 나 자신이 여성이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학급이 두 개인 사립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계속 반장을 했다. 남자 아이들은 내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와 동기들이 ‘여자’라고 구분해 어렴풋이 느낀 정도였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본과 3~4학년 때다. 산부인과 클리닉을 돌며 여성들이 정의롭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이 싹텄다. 당시 자궁경부암 말기 환자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가족과 사회적 보살핌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Q. 다양한 정치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친박(親朴)’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나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는 조금도 조사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무례하다. 굉장히 불쾌했다. 여러 시민단체들과 시민운동을 하고 있던 중에 국회의원 영입 제의가 왔었다. ‘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 100명에 포함돼 그 대상이 된 것 같다. 몇 번 거절하다가 결국 수락했다. 그 후 국회에 들어가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됐고, ‘정책통’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 대선 당시 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관련 정책을 만들었고 총선 때도 마찬가지다. 정책 외의 것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NMC 발전을 위해 잘 할 자신이 없었다면 지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간 쌓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왜 엉뚱한 곳에서 일하겠는가.


Q. 법인화 이후 ‘최초의 여성·비서울대’ 출신 원장이다.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드는지


굉장히 자랑스럽다. NMC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성아동 미래비전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남녀 동수 운동’을 한 적이 이다. 지금은 국가가 인정한 여초시대다. 동수이거나 여초가 맞다. 의도치 않게 ‘선’을 넘은 꼴이 됐지만, 여성 원장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길이다. 학력과 관련해 NMC는 완벽한 멜팅팟(Melting Pot·인종·문화·출신 대학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동화되는 현상이나 장소)이 돼야 한다. 사회적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배경에서 해방돼 자유로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내 임무다. 사람의 실력을 봐야지 학력 등 배경을 구태여 따질 필요가 있나. 소수자의 다양성을 넓히는 대표주자로 봐줬으면 좋겠다.


Q. 서울대 출신 의료진이 많다. 이들과의 관계설정에 이목이 집중된 상태다


NMC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의 관계는 굳건하다. 멜팅 팟이 돼야 한다는 것은 다양화돼야 한다는 의미이지 특정 학교를 배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서울대학교는 국립이기 때문에 NMC와의 관계는 꾸준하고 활발할 수밖에 없다. 또 그 관계를 발전시키면 엄청난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 출신 의료진 역시 다양성의 한 부분이다. 굉장한 자원이다. 서울대학교와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Q. 공공보건의료본부장 내정설로 의료원이 시끄러웠다


내가 원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있던 얘기다. 나와는 상관 없다. 현재 내정한 사람은 없다. 내정설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앞서 언급했듯 공공보건의료본부는 중요한 역할을 할 곳이다. 그곳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훌륭한 분이 오셔야 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생의 키워드 중 하나로 정의감을 꼽았다. 정의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Q. 소통을 강조했다


진료를 하지 않아 소통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것으로 안다. 편견이다. 진료는 환자와 소통하는 시간이다. 또 이미 충분한 임상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진료를 하지 않는다고 현장을 모르지 않다. 직원들과 계속 소통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소통하는 원장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평가는 직원들에게 맡겨야 하지만, 모든 분들과 직통 연결이 가능할 정도로 소통에 매우 노력하고 있다.


Q. 열정이 대단하다. 포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NMC를 만들고 싶다. 열악한 상황에서 시작하지만 최고의 역량을 가진 NMC 직원들이 공적 자부심을 갖고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또한 공공보건의료의 기틀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이자 행운으로 생각한다. 더욱 발전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시간을 잘게 쪼개 생활하고 있다. 퇴근 후에도, 자나 깨나 NMC 생각뿐이다. 열심히 하려고 한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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