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 검사를 위한 검체 채취를 숙련된 간호사도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에 대한 논란이 의료계 내에서 지속되고 있다.
의정갈등으로 의료진 부족을 겪고 있는 대학병원들이 전문간호사의 골막천자 시행을 재개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의사 단체들은 면허 범위를 넘어선 의료행위가 확대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은 지난 12일 서울아산병원을 운영하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의료법 위반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동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은 "골수 검사는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진료 행위라고 볼 수 없다"며 이를 다시 뒤집었다.
대법원은 "환자 개별적인 상태 등에 비춰 위험성이 높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의사가 진료 보조행위 현장에 입회할 필요 없이 일반적인 지도·감독 아래 골수 검사에 자질과 숙련도를 갖춘 간호사로 하여금 진료 보조행위로서 시행하게 할 수 있는 의료행위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에 해당 사건을 고발한 대한병원의사협의회(이하 병의협)는 즉시 "의료 전문성을 무시하고 의료인 면허체계 근간을 흔든 오판"이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 서울아산병원 관계자는 "재판 과정 중 간호사의 골막 천자를 중단했었다"면서도 "대법원 판결이 나온 만큼 향후 이를 재개할지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쟁점 ①의사만 할 수 있는 의료행위인가 ②간호사 진료보조행위의 업무 범위
간호사의 골막 천자 시행을 두고 최근 몇년간 의료계 내에서도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지난 10월 8월 열린 공개변론에서 오경미 대법관마저 "의료 사건을 여럿 맡았지만 이렇게 치열하게 의견이 갈린 사건은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대법원은 이번 사건의 쟁점으로 △의료행위인 골수 검사가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의료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 △간호사의 진료보조행위의 업무 범위 및 그 위임의 정도 등 크게 두 가지로 짚었다.
이를 두고 1심에서는 검사 목적 골수 검사는 '의사가 직접 의료행위를 해야만 하고, 종양전문간호사 자격을 가진 간호사들이 의사의 지시나 위임 아래 의료행위를 하는 것이 무면허 의료행위에 해당한다'는 점이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고심에서는 의사의 현장 입회 여부를 불문하고 간호사가 검사 목적의 골수검사를 직접 수행한다면 진료보조가 아닌 진료행위 자체에 해당하므로, 무면허 의료행위에 해당한다면서 아산사회복지재단에 벌금 20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 공개변론에서도 검찰 측과 재단 측은 각자의 주장을 관철했다.
검찰 측은 "골수 검사는 마취, 골수 검사, 골수 흡인, 골수 생검의 일련의 단계로 이뤄지는 고도의 의료행위로, 마취나 골수 채취에 대한 전문성은 물론 부작용 및 합병증에 대한 지식과 응급상황에 대한 대응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설령 전문 간호사가 일부 업무를 보조할 수 있어도, 의사의 구체적 지시와 감독이 필수적"이라며 "골수 체취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이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어 골수 체취에 대한 숙련도로 해결할 순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정재현 해운대부민병원 소화기센터 진료부장은 "현재까지 간호사가 골수검사를 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한 수많은 검증 및 연구가 부족하다"며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침습적 의료행위"라고 강조했다.
반면 아산사회복지재단 측은 "골수 검사는 시술 과정이 단순해 고도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중대한 부작용 발생 가능성이 매우 낮아 환자의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가 초래될 위험이 거의 없이 시행될 수 있다"고 했다.
재단 측 참고인인 배성화 대구가톨릭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골수 검사 자체가 의사만이 가질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며 "누구나 부위를 확인할 수 있고, 사람마다 차이가 없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서 숙련만 되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고 말했다.
대법원 "골수 검사, 숙련된 간호사가 진료 보조행위로 시행 가능"
치열한 공방 끝에 대법원은 결국 아산재단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의료법은 의료인 상호 간에 각각의 업무 영역이 어떤 것이고 그 면허의 범위 안에 포섭되는 의료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인지에 관해 아무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며 "의학 발달 등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것임을 감안해 시대적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법 해석에 맡기는 유연한 형태가 더 적절하다는 입법 의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봤다.
이어 간호사의 업무 범위에 대해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진료의 보조' 행위의 범위에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요해 반드시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의료행위'가 포함되지는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그런 의료행위 자체가 아니라면 의사는 의료행위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진료의 보조' 행위를 간호사에게 지시하거나 위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간호사의 '진료의 보조' 행위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는 △해당 의료행위가 진단‧치료 등의 본질적‧핵심적 부분인지 여부 △해당 의료행위가 시행되는 부위 및 구체적 방법과 난이도 △요구되는 의료지식과 기술의 수준 △해당 의료행위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나 후유증의 내용 및 그 위험성의 정도 △임상의학 분야에서 시행되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실질적인 의료분업 현황 △의료기술과 의료산업의 발전 양상과 의료환경의 변화 △의료서비스 수요자의 인식과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간호사가 ‘진료 보조’를 할 때 모든 행위 하나하나마다 항상 의사가 현장에 입회해 일일이 지도․감독해야 한다고 할 수 없고, 경우에 따라 의사가 진료의 보조행위 현장에 입회할 필요 없이 일반적인 지도‧감독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고 봤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골수 검사는 자질과 숙련도를 갖춘 간호사가 진료의 보조행위로서 시행할 수 있는 의료행위"라고 봤다.
구체적으로 "골수 검사는 질환 진단이나 치료를 위한 본질적·핵심적인 의료행위가 아니"라며 "환자의 후상 장골극(PSIS) 부위에서 수직 방향으로 골수채취 바늘을 삽입하면서 골막을 뚫어 골수강 내의 골수를 채취한 다음 골수 조직을 채취하는 행위로 침습적인 의료행위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위험성이 낮다"고 판시했다.
더불어 "통상의 환자에 대해 후상 장골극 부위에서 시행되는 경우 환자 간의 해부학적 차이가 크지 않고, 골수 검사 과정에서 의료기관별로 표준화된 골수 검사지침을 준수한다면 검사자 재량이 적용될 여지가 적다"며 "골수 검사에 대한 자질과 숙련도를 갖춘 간호사라면 의사가 그 현장에 입회할 필요 없이 일반적인 지도·감독만으로 골수 검사를 충분히 시행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환자의 체구가 작거나 성인과 같은 정도로 골화가 진행되지 않은 소아 등과 같이 골수 검사 과정에서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나 검사 부위 합병증 발생 여부를 직접 파악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의사가 골수 검사 현장에 입회해서 진료 보조행위를 하는 간호사에 대해 구체적인 지도·감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의협 "의료기기 영업사원도 의료행위 수행할 수 있다는 논리" 반발
대법원 판단에 대해 의사 단체들은 크게 반발했다.
병의협은 대법원 선고 직후 "2차 병원은 대학병원만큼 의사 인력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대법원에서 간호사가 골막 천자를 할 수 있다고 판결해 버리면 골막 천자는 숙련됐는지 알 수 없는 간호사가 하게 될 것"이라며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발생할 심각한 의료사고와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이 입을 수밖에 없다"고 개탄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입장문을 내고 "본질적으로 간호사의 면허된 업무 범위는 의사 지도하에 진료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인데 부위의 안정성, 단순 숙달 등을 이유로 면허된 범위가 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단순 숙달되는 것에 의해 면허 범위 외 의료행위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간호사뿐만 아닌 간호조무사, 의료기기 업체 영업사원도 의사 지도·감독 없이 의료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에도 적용 가능한 논리"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