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된 우리나라에서 대형병원에 환자가 몰리는 ‘쏠림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선택진료비 폐지 이후 대형병원 환자쏠림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앞으로 건강보험 보장성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이 같은 환자쏠림은 점점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병원 외래진료비 규모가 의원 외래진료비를 추월한 것은 이미 10여 년 전 일이다. 최근 건강보험 진료비에서 의원급 진료비 비중은 매년 약 4~6조(약 1%)씩 줄어들고 있다. 동네의원과 함께 동네병원도 몰락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병원 중 제대로 된 급성기 종합병원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은 5개 중 1개에 불과하다. 소규모 단과병원이나 전문병원 같은 틈새시장과 요양병원만 번성하고 있다.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더욱 왜곡되고 의료계는 더욱 어려워 질 가능성이 높다.
의사와 병원에게 의료전달체계 개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할 수밖에 없는 생존의 문제이다. 붕괴된 의료전달체계와 환자쏠림으로 인한 병리현상은 우리나라 의료체계 곳곳에서 드러난다.
대형병원 환자쏠림은 동네 병의원에게는 ‘환자 공동화’로 이어 진다. 환자가 줄어든 병의원은 과잉진료와 비급여 진료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영양주사와 건강검진, 비만치료와 같은 비급여 진료에 치중하는 병의원이 늘어가고 있다.
심지어 상급종합병원보다 병원의 비급여 진료비 비중이 더 높다. 장기입원도 늘고 있다. 의료법 상 일반 병원이지만 실제는 요양병원처럼 운영되는 병원이 3백 곳 가까이 된다.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져있으니 동네 병의원은 대학병원과 경증 환자를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대학병원과 경쟁하려니 값비싼 장비를 들여 놓아야 하고 시설을 쾌적하게 고쳐야 한다.
그런데 대학병원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이른바 빅5와 경쟁에서, 다른 대형병원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다. 대한민국 의료계 전체가 누군가는 망해야 하는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인 의과대학 교수의 삶의 질도 나빠지고 있다.
몰려드는 경증환자를 보다보니 중증환자를 제대로 진료 하기 어렵다. 중중환자를 정상적으로 진료하려면 점심을 건너뛰거나 교육과 연구를 위한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 환자 진료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밀린 연구와 강의준비를 위해 야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물론 건강보험에서 난이도가 높은 중증환자 진료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대학병원의 고유한 역할인 교육과 연구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것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긴 하다.
그런데 최근 의료계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의료전달체계를 복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 버렸다.
실타래처럼 얽힌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하기 위해 의료계와 시민사회, 정부를 포함한 여러 당사자들이 지난 2년간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의료전달체계협의체 개편 권고안’이 지난 2월 의사협회와 병원협회 이견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폐기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만간 의료전달체계 개편 논의가 다시 시작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문재인 케어 저지를 공약하고 당선된 새 의사협회장이 정부, 시민사회와 먼저 의료전달체계 개편 협상을 제안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시민사회도 시큰둥하다. 지난 협상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판을 깬 상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협상이 다시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의사협회가 협상의 상대방인 병원계나 시민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지난번과 같은 요구를 반복한다면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하는 것이 의료계가 상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지만, 의료전달체계의 미래는 밝지 않다. 솔직히 말해 매우 어둡다.
개원의, 중소병원, 종합병원, 대형병원, 그리고 환자와 정부 모두 의료전달체계를 꼭 개편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돼야 가능할 것 같다. 어둠이 깊어야 새벽이 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