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 기여 '면역항암제'···국내 대형제약사 '도전'
유한·동아ST 등 85조 시장 확보 위한 후발주자 경쟁 치열
2018.10.06 06:30 댓글쓰기

[데일리메디 양보혜 기자] 면역항암제가 대세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면역항암제 개발에 기여한 과학자들이 선정되면서 그 위상을 재확인했다. 이 같은 흐름에 국내 제약사들은 얼마나 대응하고 있을까.

5일 업계에 따르면 전세계 항암제 시장 규모는 2016년 이후 연평균 성장률(CAGR)이 13%씩 증가해 2022년에는 1900억 달러(약 214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중 3세대 항암제로 분류되는 '면역항암제'는 2015년 169억 달러(약 19조원)에서 2022년 758억 달러(약 85조원)로 급성장하고 있다.

약가가 '억' 소리 나게 비싸지만, 수요는 점점 늘고 있다. 

이유는 기존 항암제와 달리 몸 속에 있는 면역세포를 이용해서 암 세포를 공격하게 때문에 부작용이 적고, 치료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발 빠르게 개발에 뛰어든 다국적 제약사들이 면역항암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대표 주자로는 MSD이 폐암 치료제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 BMS의 '옵디보(성분명 니볼루맙)'가 꼽힌다.

면역체계를 교란하는 'PD-1' 단백질을 억제하는 기전을 가진 두 약은 2014년 출시 이후 고속성장해 연 매출이 조(兆) 단위에 달한다. 

이번에 노벨상을 받은 혼조 다스쿠 일본 교토대 교수가 바로 이 단백질을 발견했다. 또 다른 수상자인 제임스 앨리슨 미국 텍사스주립대 면역학과 교수는 타깃물질인 'CTLA-4'를 찾아냈다.  

한 외자사 관계자는 "항암제는 기존 치료제가 가진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혁신'이 일어났다"며 "다국적 제약사가 선점하고 있는 이 시장에 국내 제약사들이 진출하기 위해선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국내 제약사들도 면역항암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상용화할 수 있는 제품을 출시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항암제 개발 시 생기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차별화된 기술력을 갖춘 바이오벤처에 투자하거나 공동연구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모습이다.

유한양행의 경우 지난 2016년 테라퓨틱스와 합작해 설립한 바이오벤처 '이뮨온시아'가 면역항암제 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PD-L1을 타깃으로 하는 면역항암제 'IMC-001’의 임상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바이오벤처 에이비엘바이오의 신약 후보물질을 사들여 면역 항암제 공동 개발을 하고 있다. 이외에 굳티셀, 앱클론 등 바이오벤처와의 공동연구, 기술도입 계약 체결에 670억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한 상태다. 

동아에스티는 올초 아스트라제네카와 면역항암제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했다. 아스트라제네카가 연구 중인 3가지 면역항암제 타깃에 대한 선도물질 및 후보물질을 도출하는 물질탐색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한다.
 

일본 바이오회사 타카라바이로부터 항암바이러스 신약 'Canerpaturev'을 도입해 국내 독점 개발하고 있다. 작년 말 애비브에 6300억원 규모에 기술 수출한 면역항암제 후보물질을, 해당 제약사와 공동 개발하고 있다. 

GC녹십자셀도 지난해 CAR-T(키메라 항원 수용체-T세포) 항암제 개발에 돌입, 올해 임상 1상 진입에 들어갈 계획이다. 면역항암제 '이뮨셀-엘씨'는 지난 6월 미국 FDA로부터 간암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보령제약의 바이오벤처인 '보령바이젠셀'은 암세포를 효율적으로 찾아가는 면역세포를 실험실에서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조만간 국내 임상 2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면역항암제 개발이 붐이 된지 2~3년 됐지만, 사실 국내사의 경우 제품 상용화보단 일정 단계에서 기술수출하는 데 관심이 더 많다"며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국내 제약업계에 거는 기대가 크지만 타깃이 제한된 면역항암제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투자하기가 현실적으로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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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명의 크리스천의 충성 10.06 19:30
    제목) 양자역학의 문제점은 전자의 속도가 양자화(불연속적)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옳았다.



    만일 양자역학이 옳다면 전자의 속도(v)는 양자화되어야 하죠. 다시 말해서 전자의 속도가 불연속적인 값을 가진다는 것이죠. 그러나 전자의 속도는 연속적인 값을 가질 수 있죠.



    물질파(드 브로이파)의 파장(람다 λ)은 λ=h/(mv) 여기서 mv는 운동량p임 mv=p



    만일 양자역학이 옳다면 물질파의 파장(λ)은 양자화되어야 하죠.

    그러나 전자의 파장은 연속적인 값과 불연속적인 값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죠. 연속적인 값이 불연속적인 값을 포함하죠.



    연속적인 값 ⊃ 불연속적인 값

     결론적으로 입자의 운동량(p)과 위치(x)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는데 양자역학(불확정성 원리)처럼 불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논문 확정성 원리의 기초에 관하여(2000년 5월 중순에 발견), 논문 비양자역학의 기초에 관하여(2001년 7월 중순에 발견,A4용지 13페이지분량)

    비양자역학(확정성 원리)이 아인슈타인등등이 기대했던 이론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불확정성 원리)이 불완전하다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죠. 비국소 숨은 변수 이론(non-local hidden variable theory)이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와 플랑크,봄,와인버그등등이 기대했던 이론입니다. h=mλc에서 빛의 속도(c)가 변하므로 플랑크상수(h)는 플랑크변수(숨겨진 변수)가 됩니다. 드디어 제가 숨겨진 변수를 발견해서 양자역학(불확정성 원리)을 대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아마추어 물리학자(크리스천)입니다.



    출처: http://snuphyalibrary.tistory.com/guestbook?time=1504686411 [] 서울대 물리학부 물리도서실
  • 11.06 16:30
    불확정성의 원리가 틀리다면 어떻게 광전효과랑 흑체복사가 설명과 자외선파국은 어떻게 설명 하실건가요?
  • 크리스천의 이름으로 10.06 19:16
    제목) 이휘소에 대해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이 옳은 점이 있었다.(강주상이 옳은 점이 있음,책 이휘소평전)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를 완성하고 사퇴하려고 했다.(이휘소 박사님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199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가능성이 높았음)



    책 로스트 이휘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가 완성되고 나면 1980년이후에 핵무기를 공개하고 나서 사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잘한 것은 빼고 국민에게 잘못했던 내용의 사퇴성명서를 쓰라고 당시 선우련 국회의원에게 1979년 1월에 말했는데 증인이 2명이 더 있었다고 선우련 국회의원이 나중에 알았다고 합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이 사퇴할 것이라는 것을 몰랐죠.



    소립자 물리학계 천재 과학자 이휘소(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서(편지)를 이휘소에게 보냈고 1977년에 일본에서 어머니에게 친서를 주면서 잘 보관하라고 말했으나 분실했고 복사본은 이휘소가 갖고 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음)



    소립자 물리학계 천재학자 이휘소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휘소는 경기고 2학년 때 대입검정을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입학. 재학중 미국으로 건너가 1956년 마이애미대학 물리학과를 수석졸업, 1958년 피츠버그대학 석사,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이학박사를 받고, 28세로 이 대학 정교수가 된다. 이후 뉴욕주립대학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학 이론물리학교수 겸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연구부장 등을 맡는다. 그는 특히 1960년대 SU(6) 군이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1970년대 쿼크와 참이론(charm,참 쿼크의 질량을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계산)으로 명성을 높였으며, 게이지장이론을 다루면서 이 분야에 독보적인 기여를 한다. 1972년 발표된 게이지장이론은 그의 가장 훌륭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살람은 이를 거의 완벽한 이론이라고 극찬한다.



    1974년 9월 이휘소는 미 국무부 요청으로 서울대에 AID교육차관 타당성조사차 20년 만에 귀국한다. 이때 박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초청, 국가안보위협을 상기시키며 그의 귀국을 요청한다. 핵무기개발에 참여하고 싶지 않던 그는 대통령의 제의를 사양하지만, 강대국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조국의 신세에 고민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개발 집념

    1977년 3월 이휘소는 다시 박 대통령으로부터 그의 귀국을 간청하는 편지를 받는다. 주한미군 1만7천여명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급박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이휘소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일기에 담는다.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놓여 있다고 가정할 때, 내가 조국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원리를 제공한다면,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죽는다! 내가 죽어 조국을 살릴 수 있다.…하늘이여! 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소서.”



    마침내 이휘소는 친분있는 외과의사를 찾아가 미사일·핵무기 제조원리를 따로 정리·축소해 만든 기밀문서를 내민다. 그의 다리 살 속에 소독된 종이가 넣어졌다. 5월 20일 이휘소는 세미나 참석차 도쿄를 방문, 그날밤 비밀리에 청와대에 도착해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전달한다.

    1977년 6월 16일, 이휘소는 세미나 참석차 가족과 함께 자가용으로 집을 나섰다. 시내를 벗어나자 트럭 몇 대가 그의 차에 따라붙었다. 일리노이주에 가까운 케와네시 근처(고속도로)에 이르렀을 때, 맞은편에서 오던 대형 유조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이휘소와 가족이 탄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차 앞머리가 처참히 부서지고 가족 모두 정신을 잃는다. 가족들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으나 이휘소는 사망하고 만다.



    이휘소가 한국에게 미사일 및 핵 제조원리를 넘겨주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후, 미국의 원자력정책은 급전환한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한국정부에 ‘인권탄압중지, 긴급조치 즉각해제, 독자적 핵개발추진 즉시중지’ 등을 압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