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성은 기자] “의료혜택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제공돼야 하며, 의사는 한시도 환자를 떠나선 안 된다.”
20년 동안 병원을 집 삼아 하루 종일 환자 곁을 지킨 의사가 있다.
그의 아들은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병원을 먼저 구하실까, 나를 구하실까’라는 생각을 품곤 했다.
2013년 5월 7일 향년 87세로 영면에 들어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된 故 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떠난 지 5년 째 되는 해 아들인 박준영 씨는 ‘凡石 박영하의 인간사랑’을 발간했다.
그에게 아버지인 박영하 회장은 의사, 그리고 을지재단을 빼놓고 떠올릴 수 없다.
‘의료는 복지다’로 시작해 ‘당신과 함께한 모든 것이 행복한 을지가족’으로 갈무리된 묘비 문구는 박영하 회장이 살아온 시간 그 자체다.
야간 병원인 박 산부인과부터 시작해 박영하 산부인과 의원, 종합병원인 을지병원, 대전을지병원, 을지대학부속병원, 금산을지병원, 노원을지병원, 강남을지병원, 을지대학교병원까지. 박영하 회장이 설립한 병원 명만 나열해봐도 그가 얼마나 빈틈없이 활동해왔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첫 출발선에서 박영하 회장은 거의 맨몸인 상태였다. 그의 어록에 따르면 1956년 을지병원 최초 개원 시 그에게 믿을 것이라곤 “건강한 몸뚱이와 정신력, 비장한 각오”뿐이었다. 풍족한 유산, 학연, 지연도 없이 어떠한 도움도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특별한 비결도 없었다. 단지 ‘의사는 항상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와 ‘근검절약’이란 스스로의 가치관을 실천할 뿐. 그렇게 산부인과의원을 개원한 지 11년 만에 종합병원을 설립했고 을지병원을 넘어 재단을 조성한 그였다.
6.25부터 시작해 영아생존율이 급증하던 시절, 건강보험제가 도입된 시기, 강남 개발이 시작되던 시점, 컴퓨터 도입 순간, 나아가 스마트의료를 논하는 지금까지 박영하 회장이 살아온 날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근현대사가 생생하다.
수면제를 먹고 미리 자뒀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며칠이고 서서 밤샘 수술을 했던 군의관 시절은 그로 하여금 생명의 소중함과 신속·명확한 판단력을 몸에 익히게 했다.
휴전 후에는 보건위생 개념이 확립되고 산부인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며 가정 출산 대신 병원 분만이 늘었다. 산모와 영아 사망률은 크게 줄었지만 그만큼 박 회장이 환자를 돌보지 않는 시간도 줄었다. 아니, 가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런 시간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 회장의 업적을 모두 아우르는 것은 공익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때에는 대전을 비롯한 의료취약지만 골라서 최첨단 종합병원을 세우던 그였다.
범석의학박물관, 을지의생명과학연구소 등 각종 공공기관 설립은 말할 것도 없으며, 특히 교육기관 마련에 당시로서는 무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쏟았다.
서울보건전문대학 인수부터 시작해 무리하게 교지를 매입하며 역시나 의료취약지인 대전에 을지의과대학을 설립했다. 이후 을지의과대학교는 을지대학교 대전캠퍼스로, 서울보건대학은 을지대학교 성남캠퍼스로 명칭이 변경됐다.
범석학술장학재단을 설립해 학술논문상 등을 수여하며 보건의료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공공성을 중요시하는 배경에는 돈, 명예보다 항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들 박준영 씨에 의하면 박 회장은 “매사에 인간적인 애정이 사람과 조직을 하나로 묶어 궁극적인 성장으로 이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일상에선 부하직원에 안부를 먼저 묻고 걱정을 건넸으며, 지역사회에서 각종 지역 협력 사업을 실시한 그의 업적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을지대 교육이념은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건학 이념을 바탕으로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참 보건의료인 양성’이다.
현재 을지재단은 2020년까지 을지대학교 의정부캠퍼스와 부속병원 건립을 앞두고 있다.
“나의 한평생은 곧 인술(仁術)을 통한 봉사의 길이었다. 나는 의사로서의 천직을 어떻게 하면 보다 성실히 수행할 것이냐 하는 것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의 정신은 재단의 의료·교육 등 각종 사업과 함께 오래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凡石 박영하의 인간사랑'은 비매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