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조정법發 산부인과 절망 시나리오…의사들 "은퇴후 의료공백 걱정"
의료사고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하 의료분쟁조정법)이 4월 8일 시행됨에 따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확정됐다. 논란이 됐던 분만 무과실 의료사고 보상 분담률은 국가와 의료기관 각각 7:3으로 결론 내려졌다. 5:5에서 7:3으로 조정된 것을 제외하고 의료계가 우려하던 조항들은 그대로 남았다.
이에 따라 의료계는 “정부가 의료분쟁조정법과 하위법령안의 문제점을 전향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한 절대 조정중재원 구성에 참여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며 “조정절차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향후 정부의 막무가내식 일방적인 제도 추진을 예의주시할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의료분쟁조정법의 중심에 선 산부인과는 심각한 위기의식과 함께 결연한 각오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의료계 TFT를 이끌고 있는 김암 위원장(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 교수)을 만나봤다.
“일본 보면 한국 산부인과 미래 보인다”
김암 위원장은 “지금의 산부인과를 보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운을 떼면서 “선례가 있는 일본을 참고해야 한다. 일본은 의료제도 및 변화가 한국보다는 조금 빠르면서도 저출산과 고위험 임신이 많은 상황 등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양상이다. 현대인들이 만족할만한 분만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자본, 인력, 희생 등이 담보돼야 한다. 일본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해가는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산부인과가 어렵다”고 실상을 전했다.
오지 수당과 같은 산부인과 의사들을 위한 정책이 존재하나 근본적으로 산부인과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초강수를 두고도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을 보면 한국의 산부인과 미래가 보인다는 의미다.
그는 “일본에서는 심지어 산부인과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등록금을 대주는 등 혜택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어렵긴 마찬가지”라면서 “전공의들이 산부인과 미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의료분쟁조정법마저 개선되지 않는다면 산과의 앞날은 답답하기만 하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4월 의료분쟁조정법의 핵심인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열고 본격적인 분쟁 해결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초대 원장으로 추호경 변호사를 내정한데 이어 상임조정위원에 하철용 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정해남 전 헌번재판소 사무차장·이동학 변호사·황승연 변호사를, 상임감정위원으로 장영일 서울대 명예교수(치과의사)와 김영제 서울시립동부병원 산부인과 과장을 선발했다. 이와 더불어 의료사고로 인한 의료분쟁 조정·중재 및 감정업무를 수행할 비상임 조정·감정위원을 지난 3월 19일까지 모집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비상임위원 추천 거부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촉구해오고 있다.
김암 위원장은 “의료사고 보상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7명인데 그 중 의사는 2명뿐”이라면서 “5명은 비전문가며 최종 결정을 다수결로 한다. 환자, 의사 모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사들끼리 결정한다고 하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면서도 “의사협회 공제회 활동 등을 비쳐볼 때 의사들은 오히려 의학적 판단을 아주 면밀하게 본다. 결코 편을 들어주는 일은 없다. 의사들 본인이 수행하는 의료 부분에 있어서 비의학적인 의견이 더해진다는 것에 우려가 많다”고 강조했다.
“중재원, 보상 중심이면 의료분쟁 조장시키는 꼴…헌법소원 진행”
이에 따라 중재원이 근본적인 방향 설정을 예방 중심으로 바꾸고 국민건강과 올바른 진료환경 만들기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그는 “일부 외국의 경우 정부가 아닌 보험사들이 중재원 역할을 하고 있다. 하물며 기업의 돈이 나가는 일인데 얼마나 철저하게 검사하고 판단하겠느냐”면서 “중재원은 전문가들의 통계와 논의를 통해 의료사고 예방 자료를 모으는 것에 본래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보상을 위한 중재원이 된다면 많은 의료분쟁을 되레 조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산부인과계는 의료분쟁조정법 문제점을 피부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즉각적인 대응 모색에 나섰다. TFT를 꾸리기 위해 이례적으로 지원자를 공개 모집하기도 했다. 보다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대처를 위함이었다. 산부인과 전반의 목소리를 담고자 학회와 개원가, 분만병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의료분쟁조정법 TFT가 구성됐다.
김암 위원장은 “열정을 가지고 일할 사람들이 자원해 다른 TFT보다 활동적이고 효율적”이라면서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역할이다. 하지만 기꺼이 감수하면서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개원의사나 교수 할 것 없이 산부인과를 걱정하고 미래를 끌고 갈 만한 의사들이 이번 TFT를 통해 발굴됐다는 점에 의의가 크다”고 전했다. 의료분쟁조정법이 시행되는 4월, 이들은 우선적으로 헌법소원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모법의 경우 법 발효 후 헌법소원을 통해 움직여야 하는 부분으로 TFT는 독소조항 개선을 위해 헌법소원 제기를 준비 중이다.
김 위원장은 “헌법소원은 당연히 진행된다. 모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헌법소원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번에 만들어진 의료분쟁조정법과 관련, 외부에서도 의료계 의견에 일부 공감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늙어가는 산부인과…분만 의사ㆍ당직 의사 없어
산부인과 사회가 점차 고령화되고 있다. 일선에서 활동 중인 의사들이 진료 현장에서 물러난다면 이를 이어 받아 산부인과를 끌고갈 젊은 피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산부인과는 전공의들의 기피 과로 낙인 찍힌지 오래고 전공자라 할지라도 분만을 하겠다는 의사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분만과 응급상황을 위해 24시간 대기조가 필요하지만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의사들 역시 점차 줄고 있다. 대학병원 산부인과 과장들과 분만전문병원장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김암 위원장은 “지방에 내려갔더니 지역 거점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레지던트가 통틀어 2명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오죽하면 교수들끼리 만나 정년퇴직 후 당직이나 돌면서 생활하면 어떻겠냐는 소리를 했다. 산부인과 진료 현장을 지킬 사람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임상 경험이 풍부한 산부인과 의사 구하기가 어려워지다 보니 분만전문병원들도 애를 먹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분만전문병원도 대학병원에서 다양한 케이스를 경험한 의사들이 오길 바라지만 대학병원조차 사람이 없다. 많은 변수를 감당할 수 있는 여력들이 없는 것”이라면서 “충원이 되지 않아 원정출산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제왕절개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지난 해 12월 전국 산부인과 전공의 4년차 60명을 대상으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50:50 부담하게 될 분만 관련 무과실보상제도가 본격 시행될 경우 애초 분만의사가 되겠다고 응답한 전공의 35명 가운데 약 90%가 분만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답했다. 실제 산부인과 전공의 29%는 분만의사가 된다는 것 자체에 회의적인 인식이 강했다.
그 이유(복수응답)로는 △분만 자체가 갖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발생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다(87%) △분만관련 의료분쟁이 너무 잦기 때문(74%) △응급이 많아 개인 여가시간이 보장되지 않아서(70%) △낮은 산과 수가로 분만실 유지가 부담스럽다(57%) △분만의사에 대한 사회의 존중 결여(39%) 등이 거론됐다. 이에 따라 “수련 1년차 때 시행령이 발표됐다면 전공의 수련을 아예 포기했을 것”이라는 대답도 무려 44%로 집계됐다.
의료분쟁조정법이 전공자 부족과 분만 의사 절대 감소로 이어지는 등 정부의 저출산 고령화 정책과 연결 지어도 무리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인 셈이다.
“산부인과 위기 공감은 하는 것 같은 정부…”
쓰나미급 산부인과의 위기는 정부 역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잡음이 생기고 있는 의료계 정책과 산과 현안이 상당 부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산부인과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이성적인 방법으로 움직임을 지속해나가겠다는 것이 TFT의 방향이다.
김암 위원장은 “정부 역시 산부인과의 어려움을 잘 알고 정책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의료계 입장을 일부 수용해주는 방향으로 개선점이 모색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어려운 환경이지만 극한 방법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TFT나 산부인과만의 문제가 아닌 의료계 전반의 사안인 만큼 의료계가 공동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산부인과는 정말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무엇을 얻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 죽겠으니까 힘들다는 것”이라면서 “의료분쟁조정법의 문제점을 개선해나감으로써 결국 국민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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