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료란? 명확한 개념 없어 주체마다 '우왕좌왕'
전문가들 '정부 역할 무엇보다 중요'
2012.05.01 10:30 댓글쓰기

최근 한 병원의 협약식에 참석한 보건복지부 손건익 차관은 “얼마 전까지도 공공의료가 어떤 개념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공공의료 공공의료하는데 이 단어에 대한 정의는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고 언급했다. 손건익 차관의 발언은 의료계의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공공의료 관련 토론회나 발표 자리에서도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할 것은 공공의료의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이란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저마다 다른 그림을 그리며 말하고 있는 공공의료. 과연 공공의료란 무엇일까?


병원 공공의료지원팀은 자원봉사하는 곳?
많은 병원에 공공의료지원팀이나 공공의료과가 존재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이벤트성 의료봉사활동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공공의료에 대한 각 병원의 인식차이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봉사활동은 공공의료의 일부분일 뿐, 전부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서울대학교병원 공공보건의료지원사업단 안규리 부단장(서울대병원 신장내과)은 “봉사활동은 공공의료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많은 곳에서 봉사활동이 공공의료라는 식의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폭넓은 공공의료 행위를 추구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상황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데 외면할 수 없었기에 이러한 관행이 자리잡게 된 것 같다”고 관측했다.

 

보건의료노조 이주호 단장은 “지역봉사활동은 공공의료의 일환이지 전부가 아니다. 이러한 활동은 이벤트일 뿐,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공공의료는 아니다”라면서 “수익을 추구하는 진료활동을 똑같이 하면서 이벤트성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라고 꼬집었다.

 

제대로 된 공공의료의 개념을 수립한 뒤, 봉사활동을 하거나 의료급여 환자를 보는 순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얘기다. 각 병원에서 공공의료팀과 자원봉사팀이 구분되지 않는 활동을 벌이는 데에는 공공의료가 정확히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개념인지 인식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공공의료란 과연 어떤 개념일까
공공의료라는 개념은 크게 네 가지로 통용된다. 공공의료기관의 의료행위, 모든 의료기관의 공공을 위한 행위, 국가재원이 투입되는 의료행위, 민간병원 의료행위와 대비되는 개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정의들은 공공의료 체계를 완벽하게 대변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먼저 ‘공공의료를 공공의료기관의 의료행위’라거나 ‘정부 지원이 투입되는 의료행위’라고 정의하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지방병원과 시립병원, 국립병원 등의 재정적 뒷받침을 정부가 해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국립중앙의료원은 병원의 자립적 운영을 위해 법인화됐고, 국정감사에서도 수익률이 낮다는 지적은 계속되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지원센터 문정주 팀장(가정의학전문의)은 “국립중앙의료원은 우리나라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정책추진 현장이 돼야 한다. 단순히 큰 종합병원이나 수익을 올려서 경영을 잘하는 병원 등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다”면서 “국립중앙의료원은 지금보다 적자가 더 커지더라도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방병원도 마찬가지다. 의료 소외지역이 될 수 있는 곳에 설립돼 지역민들을 위한 의료를 제공하고 있는 지방병원이 생존의 기로에 선 것은 오래된 일이다. 보건노조 이주호 단장은 “전국 34개 지방의료원은 6~7개 병원을 빼고 다 적자다. 이들 병원의 의료급여환자 비율이 20~30%를 넘나들기 때문”이라면서 “급여환자를 건강보험환자로 바꿔서 병원 수익률을 계산한다면 지방의료원 절반 이상이 흑자로 전환된다는 통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방병원이라고 하면 국민 세금으로 지어졌음에도 경영이 방만하다거나 의료기술이 무능하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환자분포도에서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 지방의료원은 국립대병원이나 민간병원과 구분되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 박찬병 부회장(삼척의료원장)은 “많은 지방의료원들이 3중고를 겪고 있다. 공공병원, 지방병원, 중소병원의 어려움이 섞여 있다”이라면서 “원가보전이 보통 70%밖에 안된다는 것이 지방의료원 경영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고 했다.


의료기관의 공공을 위한 의료행위를 공공의료라고 정의한다면, 어떠한 행위를 공공의료라고 정의할 것인지 정확한 판단과 기존 공공의료기관들의 기능 약화 문제가 제기된다.


이주호 단장은 “요즘 대세는 공공의료를 확장해서 보려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너도나도 공공의료에 집중한다고 표방하기 시작할 때, 자칫하면 그나마 있는 순수한 의미의 공공병원들이 정체성이 약해지거나 공공의료 사업을 수행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학병원 공공보건의료지원사업단 안규리 부단장은 “그동안 공공의료기관들이 공공의료 기능을 잘 해왔다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은 다르다”면서 “기능이 충분하지 않은 공공의료기관을 지원하기엔 당장 사람 목숨이 너무 아깝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의료기관이 공공의료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되 이들을 위한 가이드라인과 감시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지원센터 문정주 팀장은 “사립병원들은 의료체계 허점에 대해 책임질 이유가 없고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면서 “공공의료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 의료체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간병원의 의료행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공공의료라는 말 또한 그 자체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공공보건의료지원사업단 안규리 부단장은 “재빨리 발전하는 사립병원 의료와 국민이 원하는 의료의 차이가 공공의료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됐다”면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의료의 개념 속에 공공의료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의료소외계층이란 단어를 듣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이주호 단장은 “공공의료란 말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의료는 애초에 공공성이 담보된 개념이지만, 민간병원이 많기 때문에 대립적인 개념으로 공공의료란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공의료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민간의료에서는 공공성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하는 행위라는 해석”이라며 “민간과 차별되는 차원에서 공공의료라는 단어에 적합한 활동을 찾다 보니 이벤트성 자원봉사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관→기능 중심, 공공의료 개념 변화
지난 2000년 제정된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 2011년 국회 통과 후 2012년 2월 1일 자로 공포됐다.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이 개정안은 공공의료를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이 확연히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복지부 공공의료과 관계자는 “개정 전에는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 제공하는 게 공공보건의료라는 개념이었다면, 이번 개정안에서는 국가와 지자체가 운영하는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기업·계층·분야에 관계없이 공공성을 띤 행위가 공공의료라고 정의했다”고 했다.


그는 “과거 공공의료 개념이 ‘행위의 주체’를 중심으로 봤다면, 이제부터는 ‘기능’을 중심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이라면서 “공공성이 강한 의료를 시행한다면 민간병원도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0년 초반에는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국가의 지원이 이뤄졌고 민간의료기관에도 지원되는 바가 소수 있었지만, 이는 사업별로 차이를 두고 진행되는 미비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 법에서 ‘기업·계층·분야 상관없이 보편적’이란 단어를 사용해 공공의료를 행하는 주체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지 않아, 정부의 공공의료 지원 방향도 달라질 것이란 얘기다.


복지부 관계자는 “어떤 곳에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가를 중심으로 정책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라면서 “전달체계의 투입적 측면이 아니라 산출적 측면에서 보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간병원 감시·관리 체계 필요…공공의료 협의체 구축 필요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하위법령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는 정부에 공공의료현장 일선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은 간곡한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들은 정부와 의료계, 국민이 함께 참여해 공공의료를 논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점과 공공의료의 행위 주체가 확대된 만큼 이들을 관리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정부의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안규리 부단장은 “정신질환자들의 정부 지원금에 눈이 멀어 환자들을 수용소와 다름없는 환경에서 지내게 하는 일부 의료기관이 존재하는 것처럼, 법만 그럴듯하고 관리가 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정안을 악용을 막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공공의료의 사업 평가가 객관성과 현장성을 고려해 이뤄져야 하고 정책과 의료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면서 “이번 개정안을 통해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소득에 관계없이 일정한 수준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가이드라인도 제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립중앙의료원 공공보건의료지원센터 문정주 팀장은 “국립병원과 시립병원, 보건소 등이 더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공공보건의료기관이 서로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의료체계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저 각기 독립된 섬처럼 존재할 뿐이라 영향력이 적다”고 말했다. 그는 “공공의료 종사를 희망하는 의료인을 흡수할 임용직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공공의료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국내 의료의 전반적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정부 정책이 확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주호 단장은 “요즘 사회적으로 복지나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새누리당을 제외한 모든 야권에서도 공공의료 개념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협의체가 중요하다. 일상적으로 공공병원 이사회나 운영위원회에 지역주민·환자단체·노조가 같이 참여하는 참여형 협의체로 운영된다면, 집단지성의 힘으로 무리한 공공의료 개념을 정립하지 않아도 현장 맞춤형 공공의료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찬병 부회장은 “지방의료원은 지방자치제에 설립과 폐지 권한이 있고 국가지원금과 지자체 지원금이 반반씩 지급되는 시스템”이라면서 “그러나 경제적·정치적 사정이 각기 다른 지자체제보다 정부 등이 나서서 일괄적으로 지방의료원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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