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임수민 기자] 국내 의료기관 병리 판독실의 모습이 변화하고 있다. 최근 병리학 분야는 의학의 여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과 결합한 ‘디지털 병리학’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진은 검체 슬라이드를 고배율 광학현미경으로 판독하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고성능 스캐너 등 AI 병리 진단제품을 활용해 더욱 정확하고 면밀하게 여러 슬라이드를 판독한다. 빅5 등 국내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는 디지털 병리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디지털병리는 세포, 조직, 장기 표본을 육안이나 현미경을 통해 판독하며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던 전통적인 방식에 광학, ICT 등을 융합해 디지털화한 융복합 진단시스템을 의미한다.
그간 병리진단은 임상 병리사가 환자의 암 세포 조직 등이 담긴 검체 슬라이드를 분류해 병리 판독 의사들에게 전달하면, 의사가 고배율 광학현미경을 통해 이를 판독하고 판독이 끝난 슬라이드를 저장고에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방식은 검체 슬라이드를 저장고에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이동 과정에서 슬라이드가 바뀌거나 분실될 위험이 있다. 여기에 판독 결과 의료진들 간 의견이 다를 때 실시간으로 함께 보며 의견을 나누기 어렵다.
반면, 디지털 병리는 슬라이드에 있는 검체를 디지털 스캐너를 통해 고배율 이미지 정보로 만든 뒤 파일화시켜 판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을 보완, 개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알고리즘 기반 이미지 분석, 전문가 집단 정보공유 등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 진단이나 치료 반응성, 예후 예측과 같은 환자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디지털병리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핵심 트랜드로 향후 성장 가능성이 높은 분야 중 하나로 꼽힌다.
보건산업진흥원은 디지털병리가 2020~2026년 기간 동안 10%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시장 규모는 12억7764만달러(약 1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진흥원 분석에 따르면 신약 발견 및 개발 분야에서도 디지털 병리 활용이 더욱 늘어날 예정으로, 2020년 신약 발견·개발 부문에서 디지털 병리 시장 규모는 1억7160만달러(약 2080억원)였지만 2026년에는 3억199만달러(약 3661억원)로 전망된다.
진흥원은 “디지털병리가 인적 오류 가능성을 줄이고, 병리학자 간 병리영상 공유를 보다 쉽게 하며, AI 기술과 결합해 진단 소요시간 감소와 진단 질 향상을 가능하게 한다”면서 “대부분의 과정이 자동화되기 때문에 인적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고, 이로 인해 진단의 질도 향상될 수 있다. 질병진단·컨설팅 분야 역시 빠른 성장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서울아산·서울성모 등 빅5 병원 중심으로 본격 도입
하지만 디지털병리는 고가의 장비 및 대용량 데이터를 감당할 수 있는 서버 구축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초기 비용이 높아 의료기관이 선뜻 도입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때문에 국내에서도 서울아산병원, 가톨릭의료원 같은 빅5 병원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금년 1월 “검체 슬라이드의 정리부터 분류, 진단, 저장, 활용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디지털화하는 디지털 병리 시스템을 전면 도입 및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병원은 검체 슬라이드를 디지털로 변환할 11대 고성능 스캐너와 판독 뷰어 서버, 그리고 10기가바이트의 독립 망을 설치했다.
병원에 따르면 단일기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 디지털 병리 인프라다.
서울성모병원은 지난 2019년 ‘필립스 인텔리사이트 병리 솔루션(Philips IntelliSite Pathology Solution)’ 도입을 시작으로 디지털 병리 문을 열었다.
인텔리사이트 병리 솔루션은 슬라이드 스캐너와 서버, 저장장치, 뷰어 등을 포함한 이미지 관리 시스템을 기반으로 디지털 병리 이미지를 자동으로 생성 및 시각화·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또한 병원은 지난해 5월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주관한 2021년도 의료데이터, 인공지능 R&D분야 신규지원사업 중 ‘디지털 병리 기반 암 전문 AI 분석 솔루션 개발 컨소시엄’에 선정돼 디지털 병리 기반의 암 전문 AI R&D 부문에서 총괄기관 역할을 맡고 있다.
서울성모병원은 디지털 병리 인프라를 조성해 암 전문 지능형 병리 AI 개발과 임상 검증을 수행하며, 한국형 중환자 특화 데이터셋을 구축해 AI 기반 중환자 임상 의사 결정 지원 시스템을 개발 및 실증하는 연구를 시행할 계획이다.
삼성서울병원과 서울대병원, 연세의료원도 진료현장에 디지털 병리를 도입하며 기반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현재 총 3대의 진단 스캐너를 구비해 1년에 약 30만건 이상의 검체를 판독하고 있으며, 용인세브란스병원은 개원부터 모든 병리 판독에 디지털 병리를 도입해 선진적인 의료 모델을 선보였다.
서울대병원은 지난 2017년 국내 최초로 디지털 병리 도입 계획을 수립했으며 이듬해인 2018년 디지털 병리시스템을 오픈했다.
인프라 구축 등 고비용 소요, 병원계 대중화 및 진입 장벽
디지털병리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 선택이 아닌 필수가 돼가고 있지만,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높은 진입장벽은 역시 고가의 초기비용 및 수가다.
디지털 병리는 슬라이드를 스캔해 이미지 파일을 서버에 보관하는 형식이라 첨단 디지털 스캐너와 방대한 크기의 저장 서버가 필요하다.
여기에 고가 장비까지 마련하려면 의료기관은 도입 시부터 큰 재정적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대형병원이 아닌 중소병원들이 디지털 병리를 선뜻 도입하지 못하는 이유다.
이에 병리학회는 디지털 병리 구축에 기반한 병리검사 판독료(진단료) 분리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병리검사 판독료는 병리과 전문의가 판독하고 소견서를 비치한 경우에 산정되는 방식을 뜻하는데, 기존의 수가에 판독료를 더하는 것이 아닌 기존 수가를 의사업무량인 판독료와 직접비용으로 분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적절한 병리판독료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의사 업무량이 상향, 조정돼야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
대한병리학회 이연수 이사장은 “현재 병리과의사 업무량은 평균적으로 약 25%인데 미국의사협회의 표준의료행위코드(CPT)에서는 35~40% 정도다. 결국 판독료 분리 전에 병리과 의사 업무량 상향 조정을 통한 현실화가 선행돼야 하는데 이는 다른 과들도 얽혀있는 문제라 쉽지 않다. 정책적 결정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 병리 인프라 구축에 들어가는 직접비용 상승분에 대한 가산료가 발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 역시 녹록지 않아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며 “의료기관 도입 활성화를 위해 디지털병리 가산료 측정, AI 병리검사 행위에 대한 신의료기술평가 등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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