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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몸 이곳저곳에 있는 경혈을 두드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한방 치료의 일환인 ‘감정자유기법’의 신의료기술 통과에 의료계가 분노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최근 신의료기술평가 담당 기관인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앞에서 시위까지 벌이면서 “이번 평가로 야기될 환자들의 피해, 국민의 의료비 낭비에 대한 책임은 모두 복지부와 NECA에 있을 것”이라며 신의료기술 등재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대한한의사협회가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나서면서 의협도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다.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의료계가 악의를 품고 한방 의료기술이 신의료기술로 등재되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해 어깃장을 놓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신의료기술’은 말 그대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의료기술이면서도 안전성과 효용성이 입증됐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임상시험을 거치고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인허가까지 받아 시중에 나온 제품 및 의료기술이라고 해도 신의료기술 평가를 거쳐야 건강보험 급여 혹은 비급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업체들이 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신의료기술 평가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문헌 평가다. 해당 기술 검증을 위해 관련 연구 결과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막 시중에 나온 기술이 평가 가능한 만큼 충분한 문헌이 있을 리가 없다. 신의료기술이기 때문에 신의료기술 통과를 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마련된 대안이 ‘제한적 의료기술’이다. 신의료기술 평가가 가능토록 임상 근거를 쌓는 기회를 주기 위해, 제한적으로나마 환자들에게 비급여 진료를 시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맹점은 존재한다.
제한적 의료기술 연구에 참여한 A교수는 “임상 근거를 모으는 연구를 위해 환자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업체로서는 일단 비급여 진료를 통해서라도 근거를 모아 신의료기술 평가에 도전하는 것이지만, 환자 관점에서는 아직 검증되지도 않은 기술을 웃돈까지 주고 체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환자들에게 이런 찜찜한 마음이 드는 방식의 치료를 권장할 수 있는 의사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다 늘어나는 R&D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업을 아예 철수하거나, 각고의 노력 끝에 신의료기술 평가를 받는 데 성공하고 나자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 업체들의 하소연이 줄을 잇게 된다.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 의료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뷰노 또한 신의료기술 평가 벽(壁)을 넘지 못했다. 넘지 못했다기보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가 신의료기술 평가 대상에 들어가는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뷰노를 ‘해외 선진출 기업’으로 선정해 글로벌 시장에 먼저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기에 지원되는 비용은 6개월간 최대 4000만원에 불과하다.
비난의 화살을 무턱대고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에게 돌리기는 어렵다. NECA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검증’이다. “한 번 사용된 기술을 되돌릴 수는 없다. 환자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검증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NECA 입장이다.
그간 업체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개선책도 다양하게 개발했다. ‘혁신의료기술’개념을 도입해 신속한 평가를 도모하고, 문헌 근거를 축적하기 어려운 기술들의 평가를 위해 사회적인 효용성에 무게를 두는 ‘가치평가’ 트랙을 개발했으며, 평가 기간 단축을 위해 식약처와 통합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신의료기술 앞에서 좌절하는 업체들의 어려움은 정책적 맹점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보건당국이 앞서 언급했듯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신의료기술 관련 제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의료기기 분야 규제 혁신 논의 또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의료계에서는 이제 겨우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감정자유기법’ 이라는 기술이 신의료기술로 등장했다. “나 자신을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라는 문장을 3회 반복하며 얼굴과 상체, 손 등에 있는 경혈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는 과정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환자의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한의계측 주장이다.
의료계가 황당함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업체들이 신의료기술 앞에 생사(生死)가 갈렸고 보건당국은 제도 개선을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음을 자처해왔다. 한 단계, 한 단계 까다로워 보였던 과정들이 갑자기 어떤 기술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대해진 것이다.
감정자유기법이 형식상 제대로 된 검증 절차를 거쳐 신의료기술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해당 기술의 유효성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의료계가 이미 불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규제 어려움에 공감하고 합의점을 찾는 대화의 장(場)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반목과 갈등의 늪에 빠지기 전에 보건당국은 서둘러 이 문제에 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