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 받은 의대생·탈북 의사 희망기
2011.01.03 22:04 댓글쓰기
[신년기획 하]2011년 신묘년(辛卯年) 새해가 밝았다. 만성화된 경영난, 옥좨는 규제와 제도들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을 겪었던 의료계. 다사다난했던 2010년을 뒤로 하고 새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모습은 다행스럽다. 이들이 말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지금의 어려움이 의료계가 앞으로 가져갈 교훈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제 의료계 내부에서도 어려움과 아픔 끝에 의사의 꿈을, 또는 명의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있다. 데일리메디가 △암 투병후 삶을 살고 있는 의사 △오랜 법적 투쟁 끝에 범법자 멍에를 벗은 의사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 꿈은 이룬 의학도 △탈북 후 국가고시에 합격한 새터민 의사를 만났다[편집자주]

“장학금 받은 기억은 평생 살아있는 교훈”
을지의대 본과 3년 박권희 "의대생 위한 장학금 지원 확대 필요”

을지대 의과대학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권희씨(29세, 남자)는 작년 장학금을 탔다. 한 학기 등록금 520만원보다 적은 액수인 200만원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학비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어 뿌듯했다.

박권희씨는 대전지역 공대에 입학해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수능을 준비해 을지의대에 입학한 케이스다. 나이가 들어 선택한 진로인만큼 의대 공부에 책임을 느끼며, 네 다섯 시간이란 짧은 수면시간에도 공부 그 자체를 즐기는 듯 하다.

그가 동기들보다 늦은 나이에 의대를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다. 군대 복직 중 아버지가 폐암에 걸렸던 것. 그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하던 가족은 아버지가 수술을 받기 직전에서야 그에게 알렸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충격이 매우 컸다고.

“암은 저랑 관련 없는 일인 줄 알고 살았는데, 막상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았단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하고 철렁 내려 앉더군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의료진을 믿고, 수술이 성공하길 기도하는 일 밖에는….”

그는 당시 장면을 회상하는 듯 허공을 보며 “수술방에서 나온 담당 의사가 ‘수술은 잘 끝났고, 회복상황을 지켜봅시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탁 놓이면서 ‘의사는 참으로 신성한 직업이구나.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습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 씨가 의대 공부를 시작할 시기 의대 커트라인은 상당히 높아진 상태인데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4년 전 일이었기에 어디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야하나 막막했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었기에 열심히 임했다고 한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 선택이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를 집도하셨던 흉부외과 김길동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겐 남다른 의미죠”라며 웃는다.

의대생이 된 후에도 매일 늦게까지 공부한다는 박권희씨에게 때때로 쉬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지금 하는 공부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다고 생각하면 대충 할 수가 없습니다. 공부를 할수록 한 과목 한 과목 끝내면서 뿌듯함도 있고, 의사는 정말 똑똑해야 하겠다는 책임감도 느낍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성실함과 고지식함은 그가 그리는 미래 모습과도 연결된다. 장차 의사생활을 하다보면 입원환자 진료에, 외래진료에, 논문도 써야하고, 각종 강의도 준비해야 해 무척 바쁜 생활을 하겠지만, 그래도 의사의 본분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박권희씨는 “환자에게 반말을 하거나, 말을 끊어 버리거나, 환자의 이름대신 질병명인 ‘장중첩증, 아뻬, 루푸스’로 지칭한다던지, 환자의 불만에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식의 태도를 지양할 겁니다. 의사는 환자와 쌍방 의사소통을 해야한다는 원리원칙을 지킬겁니다”라고 강조한다.

그 어느 학문보다 배움이 중요한 의대생들도 마냥 공부 속에만 빠져 지내기 힘든 현실이다. 다른 대학생들처럼 높은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것. 타대학에 비해 상대적인 공부량이 많아 아르바이트 할 시간은 없는데,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들어가는 학습비는 부담스럽다. 의대생들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진다.

의대 졸업장을 받기까지 들어가는 돈은 실로 엄청나다. 그는 “저는 운이 좋아 저희 학교 범석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기 50명 중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6명 남짓. 부잣집 아들 딸이 아닌 이상, 무척 부담스러운 액수죠”라고 말한다.

박권희씨는 “제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인데 장학금을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저 또한 의사가 되어 늘 다른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도움을 받은 기억은 평생 체험적 교훈으로 남는 법이니까요” 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사선 넘어 생명 살리는 새터민 의사
서울의료원 인턴과정 우민호 씨(가명) "한국 와서 성공했다는 소식 전할 것"

살기위해 사선을 넘어 한국 땅을 밟은 이들이 있다. 차디찬 강물을 넘어 제3국을 돌고 돌아 힘겹게 한국으로 온 사람들, 바로 새터민이다. 하루하루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이들 속에 한국에서 의사로 새 삶을 살고 있는 의사 우민호(40, 가명)씨가 있다. 삶의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의사 국가고시 공부에 매달렸다는 우 씨는 당당히 의사 국시에 합격해 현재 서울의료원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이다.

우민호 씨는 “살기위해 한국에 왔지만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처음엔 하루하루 먹고살 걱정뿐이었다”면서 “그래도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북한에서 했던 일을 계속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의사 국시 준비 당시를 회상했다.

생소한 언어부터 문화적 차이, 신설된 실기시험까지 넘어야 할 장벽이 많아 매 순간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렸지만 우 씨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는 새터민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 씨는 “북한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하기는 했지만 교과서 등 모든 체계가 달라 초반에 흐름을 잡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라틴어로 공부하는 북한과 달리 모든 용어가 영어로 돼있어 한국어를 공부하는 만큼 영어 공부를 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우민호 씨는 우여곡절 끝에 국가고시에 합격했지만 북한에서의 학력을 증명할 길이 없어 인턴 지원 불가라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통일부의 유권해석과 서울의료원의 검토를 거쳐 무사히 인턴과정에 합격할 수 있었다.

새터민들에게 우 씨는 삶이 희망이다. 지난 5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새터민 학생들이 공부하는 한겨레 중ㆍ고등학교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우 씨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같이 진료를 간 의사들을 두고 유독 내 앞에 줄을 선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이 한국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사비를 털어 의료서적을 사주며 독려해준 수많은 의사들과 수련환경을 만들어준 서울의료원 등에도 갚아야 할 빚이 많다.

하지만 불혹의 나이에 인턴생활을 시작한 우 씨에게 현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생각과는 전혀 다른 수련 체계와 하루 종일 이어지는 강행군에 그는 한 차례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우 씨는 “한 때 약한 마음을 먹었지만 도움을 준 의사들과 나를 희망으로 보고 있는 새터민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새터민 의사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그는 “통일부와 서울의료원 그리고 뜻을 가진 의사선생님들이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직 더 많다”면서 “새터민들을 ‘언젠가는 꼭 필요할 사람’으로 인식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방치되지 않도록 한국 사회가 많은 도움을 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북에 두고 온 가족 얘기에 눈시울을 붉힌 우민호 씨는 “새터민들이 한국에 와서 실패했다는 소식보다 성공했다는 소식을 더 많이 접했으면 한다”며 “더 많은 새터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부족하지만 나 자신부터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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