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현실로 다가오는 '단골의사'
2010.10.11 03:18 댓글쓰기
아픈 사람은 자발적으로 병원에 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뚜렷한 고통이 없는 만성질환을 달고 사는 현대인들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질환으로 병원을 찾더라도 어떤 병원의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환자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규칙적으로 복용해야 할 약을 드문드문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가 다반사. 이는 불규칙한 복용으로 내성을 키우고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증질환 진행에 따른 의료비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타개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 단골의사제다.

단골의사. 자주 찾는 식당이 단골식당이 되고 수시로 가는 노래방이 단골노래방이 되듯 ‘단골’이 되는 주체가 의사인 것을 뜻하는 말이다. 환자와 의료기관을 1:1로 연결해 만성질환을 포괄적·지속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제도로, 정부는 고혈압과 당뇨병 환자의 정기적인 치료와 자가관리를 유도하고자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도입을 추진해왔다.

의사가 특정 환자를 전담하는 주치의제와 얼핏 비슷한 뜻으로 비치지만 사람이 아닌 특정질환에 무게중심을 두고 정기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개념이 다르다. 전자가 ‘홍길동’이란 사람에 관한 질병과 건강을 1차적으로 돌본다면 후자는 고혈압 환자인 홍 아무개씨의 고혈압 관련 진료를 전담하는 식이다. 모든 과정은 의사와 환자의 자율적 참여로 이뤄진다.

복지부 질병정책과 홍정익 사무관은 “현재 추진 중인 여러 가지 모형에 따라 다르지만 주치의제 방식으로 가게 되면 환자 입장에서 선택권이 좀 더 제한받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면서 “환자 입장에서 내가 다른 병원도 못가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기존 브리핑에서 사업모형, 표준서비스 및 진료지침, 지원체계, 인센티브 등 구체적인 제도를 설계해 금년 하반기 중 시범사업을 실시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후 성과평가를 통해 전국으로 확대할지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시행 시기 2011년 상반기…단계적 확대 검토

그렇다면 이 단골의사는 어떤 경로를 거쳐 환자들과 만나고, 어떻게 ‘단골’로 기능하게 될까. 대략적인 시뮬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서울 외곽 지역에서 내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A원장은 최근 정부에서 실시하는 단골의사제 연수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내과 파트에서도 소화기 계열을 전공했지만 고혈압과 당뇨병 진료를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서다. 연수를 마치고 제출한 계획서에서 그는 올 한 해 동안 진료할 환자수와 치료 목표를 기술했다. 고정된 수입원을 새로이 확보하게 된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크지만, 1년 단위로 성과를 점검받아야 한다고 하니 두려움도 앞선다.

시뮬레이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혈압·당뇨병을 진료해야 한다고 해서 해당 진료과가 환자를 독점할 권한은 없다. 내·외과 구분 없이 일정한 연수프로그램을 거치면 누구나 ‘단골의사’로 만성질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서다.
보건복지부는 현재 4가지 모형을 두고 실현 가능성, 효율적 운영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애초 하반기 실시될 것으로 예고됐던 시범사업은 사업 모형이 확정되면 2011년 상반기 중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시범사업 실시가 예정보다 늦어진 이유는 보건복지부 내 관계 부처간 혼선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1차 의료 강화 및 의료전달체계 확립 ▲노인 의료비 대책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 확보 등 현안으로 떠오른 보건의료정책에서 유사한 제도가 쏟아져 나오는 양상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질병정책과는 만성질환 관리 차원에서 단골의사제를 제시했지만, 다른 과에서 각기 다른 이유를 들어 비슷한 제도를 추진하는 사례가 많아 내부적인 검토시간이 길어졌다”고 말했다.

의료계 적극적 참여 필수…'수가·인센티브' 관건

성패는 의료계의 참여와 관계 부처 간 협조에 달려 있다. 만성질환 등록관리 시범사업의 경우 환자가 병원에 잘 가도록 유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면 단골의사제는 의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이를 위해 다양한 당근책이 제시되고 있다. 복지부는 최근 등록환자 1명당 의사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윤곽을 잡고, 만성질환관리료 액수와 같은 세부 지침을 조율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여기에 전문가 검토 및 의사단체와의 원만한 협의가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복지부 홍정익 사무관은 “의사들이 요구하는 바가 있을 텐데, 수가나 인센티브의 적정선에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필요할 것을 보인다”며 “의견 수렴을 통해 시범사업 지역 의사들과도 협의를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는 만성질환 관리라는 제도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그간 주치의제 도입을 촉구해온 시민단체·대한가정의학회로서는 사람보다 질환에 무게중심이 실린다는 말에 힘이 빠질 법도 하다.

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원은 “복지부가 추진하고 있는 제도는 만성질환 관리 프로그램이지, 단골의사제라는 명칭은 제도를 미화시키기 위한 것 뿐”이라며 “주치의적인 요소가 결여된 제도를 왜 ‘단골의사’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이번 제도가 만성질환 관리를 활성화시키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 성과를 내기 어렵다. 다양한 합병증 발생에 대비한 포괄적인 케어가 도외시된 만성질환 관리는 도리어 부작용만 낳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대한의사협회 송우철 총무이사는 “단골의사제는 시범사업으로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제도가 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단골의사제나 주치의제와는 다른 일차의료전담의제 실현 방안을 고민해볼 시기”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단골의사에 앞서 의료전달체계부터 확립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당뇨병학회 박성우 이사장(강북삼성병원 내분비내과)은 “단골의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그에 앞서 종별 역할부터 정립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며 “합병증 관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종별 의료기관이 긴밀히 협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박 이사장은 “당뇨병 같은 경우 지금도 환자 대부분은 고정된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있다”면서 “환자와 의사를 엮어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지만 좋은 취지로 만든 제도인 만큼 교육 프로그램 등에서 협조할 일이 있으면 학회 차원에서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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