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는 온전한 생명체 vs 여성 선택권 존중
2010.03.24 03:15 댓글쓰기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외치던 70년대의 구호가 칼날이 돼 돌아왔다.

지난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출산율이 떨어지자 정부는 곧 “셋째 아이 낳으면 수백만 원의 출산장려금을 줍니다”로 정책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된 것이다.

1973년 모자보건법 제정과 더불어 가족계획 및 산아제한이 암묵적으로 진행돼 왔고 현재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저출산 현상으로 정책이 급변했지만 이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논의와 합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2005년 정부가 공개한 유일한 낙태 관련 실태 조사 결과 연간 총 34만여 건의 낙태가 이뤄졌으며 이는 당시 태어난 신생아가 약 44만 명이었던 것에 비춰볼 때 약 77%에 이르는 규모다.

출산을 제한하던 정부의 정책이 결국 부메랑이 돼 2009년 1.15명이라는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 저출산 극복이 현재 국가적 당면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

이처럼 높은 낙태율 속에서 자정의 목소리 등 본격적인 공론화가 진행된 것은 지난 2월 3일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로 구성된 프로라이프 의사회(회장 차희제)가 불법 인공임신중절 시술 병원 3곳을 검찰에 고발하면서부터다.

산부인과
의사가 그만둬야 해결 vs 인프라 개선이 먼저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심각한 수준의 낙태율을 우려, 자체적으로 불법 낙태 제보 및 구조 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산부인과 내부는 곧 진퇴양난에 빠졌다. 특히 개원가를 필두로 불법 낙태 시술을 전면 중단하자는 의견과 그 부작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낙태 문제에 대한 여론형성에 성공한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최안나 대변인은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강력한 자정운동으로 많은 동료들이 낙태 시술을 중단했으나 실효성 있는 정부 정책이 나오지 않아 강력히 항의코자 고발 조치를 했다”고 설명했다.

낙태공화국의 오명을 벗고 생명 존중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의 특단의 조치가 필수라는 입장이다. 사문화되다시피 한 낙태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사법 당국이 이제라도 그 책임을 통감하고 낙태 근절에 앞장서야 할 때”라는 입장이다.

반면 대한산부인과의사회(회장 박노준)는 “동료 산부인과 의사를 불법 임신중절 수술 행위자로 고발하는 초유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근시안적 문제 해결 방식에 심한 분노를 느낀다”며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행동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박노준 회장은 “인공임신중절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발, 처벌 강화 등으로는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면서 “성교육 및 피임 등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교육이나 인프라 개선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고발조치가 있은 후 대부분의 개원가에서는 일시적으로 낙태를 중단하기도 했지만 한 달이 넘은 현재는 수가를 올려 높은 비용으로 시술을 진행하는 병ㆍ의원이 생기는 등 일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산부인과학회(이사장 박용원)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하고 있지 않은 상태지만 보건복지가족부 및 산부인과 단체들과의 산부인과 관련 TF 회의 등에서 모자보건법 상 허용범위의 한계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법제위원회 김향미 학술간사는 “현 모자보건법이 모체에 대한 기준만 있고 태아에 대한 적응증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며 “이에 대한 논의와 함께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불법 낙태 근절에 대한 산부인과 내부적인 인식은 같으나 그 방법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법적인 처벌 및 제한으로는 결코 낙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모자보건법 개정 및 출산 환경 조성과 더불어 산부인과의 고질적인 문제인 수가 인상과 의료사고 논란, 전공의 기피 현상 등 인프라 확충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 학회 및 의사회의 공통된 의견이다.

반면 프로라이프 의사회 심상덕 윤리위원장은 “낙태를 감소시키자는 것인지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다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그동안의 경험상 원해서든 원치 않아서든 낙태 여성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본 적 없다”며 확실한 낙태 근절 목표 설정과 더불어 사회 전반적인 출산 환경 개선을 적극 요구했다.

여성계
“원치 않는 임신 강요 분위기 절대 안 돼”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 조치 이후 급박해진 것은 산부인과 쪽만이 아니었다.

여성계 역시 성명서 배포 등을 통해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의 절박함과 위급함을 외면”하는 처사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성폭력상담소측은 “수많은 낙태 건수 중 90% 이상이 사회ㆍ경제적 이유 탓”이라며 “여성을 둘러싼 삶의 조건들이 변하지 않는 한 의사와 여성을 고발한다 해도 낙태는 근절될 리 없다”고 못박았다.

오히려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무면허 시술자에 의한 음성적 낙태 시술만을 증가, 건강과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한국 여성의 전화 인권정책국 송란희 국장은 “낙태율 감소를 단순히 결과론적으로만 접근해선 안 될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성들의 부작용을 간과하지 말라”는 입장을 거듭 피력한 바 있다.

종교계
“산과의사 낙태근절 운동 적극 지지”

종교계는 1960년대부터 꾸준히 낙태는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살인과 같은 행위로 보고 천주교를 필두로 지속적인 목소리를 제기해 왔다.

천주교측은 “일부 의사들의 자정노력을 지지한다”면서 “낙태 하지 않는 병원을 이용하도록 독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천주교 서울교구 생명위원회 박정우 사무국장은 “모자보건법 개정에 대한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면서 “기형아 등 태어나 곧 죽을 수밖에 없는 태아 역시 그 생명이 가진 몫이다. 산모나 의사가 임의로 태아의 생명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며 생명윤리를 강조했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측 역시 “교회가 낙태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함께 정부의 낙태 허용규정 개정 움직임과 관련,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한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일 계획”임을 시사했다.

보건복지부
논란 속 공개한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실효성 논란 휩싸여

보건복지부(장관 전재희ㆍ이하 복지부)는 낙태 시술 병원들의 고발 조치가 이뤄진 후 실효성 있는 정부 대책 마련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관련 단체들과의 논의를 진행해 왔다.

그 골자는 복지부 전재희 장관을 필두로 대한산부인과학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종교단체, 낙태 및 생명 관련 시민단체 등 20명으로 구성된 사회협의체를 발족, 의견을 취합하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드디어 3월 1일 복지부의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가 발표된 것이다.

여론을 비롯해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른 낙태 문제에 대해 정부가 방향 설정과 목표 및 구체적인 추진 과제들을 공개하는 것이라 각계각층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 결과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을 바탕으로 △피임실천율 향상 △위기임신 상담기반 마련, 임신 청소년 건강관리 지원 △비혼 한부모 자립 지원 △불법 인공임신중절 시술기관 신고체계 마련 △예방상담제 도입, 실태조사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종합계획은 공개 직후 실효성 논란에 휩싸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제를 남기게 됐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 근절 의지 불명확 및 단속과 출산 환경 모두 미비”하다는 의견과 함께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역시 복지부가 내 놓은 시술기관 신고체계와 관련 “산부인과 의사들을 잠재적인 범법자 취급을 하는 것이냐”는 반문과 더불어 공조 및 긴밀한 논의를 요구했다.

여성계나 종교계 역시 근절에 대한 인식 여부는 공감하나 “좀 더 나은 생명존중 환경 조성”및 “여성ㆍ청소년들을 위해 단기적 대책 보단 중ㆍ장기적인 대안책 마련”을 주장했다.

이번 종합계획 발표는 정부 당국에서 낙태 관련 예방책을 내놓은 거의 유일한 것이며 시술기관 고발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대책을 요구되는 다양한 눈초리 모두를 아우르고자 하는 복지부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고 보여 진다.

이와 관련, 복지부 관계자는 “시술기관 신고체계나 실태조사 방안 등을 보더라도 단체별로 그 입장차가 매우 크다”면서 “그 합의점을 찾고 적절한 대안을 만들고자 고심”했다며 이번 발표를 둘러싼 논란을 일축시켰다.

올 상반기 의학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 ‘뜨거운 감자’로 부각된 낙태 문제.

불법적으로 무분별하게 시행되는 낙태에 대한 근절 의지는 이제 분명해졌다. 다만 같은 목표를 가졌으나 이해관계가 다른 사회 각 분야들이 그 절충점을 찾고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 승인될 수 있는 ‘교집합’ 찾기가 우리사회에 던져진 몫이다.

검찰의 시술기관 처벌 여부가 결정된 순간, 그 여파와 함께 낙태 논란은 다시금 재 점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법 낙태 근절, 그 끝을 향해 가는 과도기 속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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