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에 갇힌 10만의사
2010.04.02 21:50 댓글쓰기
[기획 1]1977년 7월 1일. 의사들은 이날을 ‘의료보험’이라는 유리병에 갇히기 시작한 날로 기억하고 있다. 이로부터 12년 후인 1989년 7월, 전국민 의료보험 시대를 맞으며 의사들의 수난의 역사가 본격화 됐다. 당연지정제로 의사들을 제도권 아래에 끌어들인 정부는 이후 ‘공공성’이라는 미명 하에 규제 일변도 정책을 전개, 의사들은 울분을 삭혀야 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물론 의사들을 투명한 유리병 속에 가둔 정부 덕에 국민들은 전세계가 우러르는 의료혜택을 받고 있지만 의사에게 동정표를 던지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다. 정책에 치이고 국민의 싸늘한 시선에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 의사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을까? 6회에 걸쳐 짚어본다.[편집자주]

대한민국 의료계에 가장 중차대한 사건은 바로 ‘의료보험제도 도입’이었다. 의료보험제도 실시 전에는 의사들은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지만 시행 이후에는 엄청난 통제와 시련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의료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977년 7월 1일 전국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전격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했다. 제도 시행에 앞서 당시 보사부는 의사들에게 의료보험제도의 핵심인 진료수가안을 제시해 달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는 관행수가의 60% 선으로 정해졌다.

당시 의료보험수가가 얼마나 불합리하게 책정됐는지는 의료보험제도가 본격 실시된 1년 후의 각종 병원 경영실태조사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실제 1979년 고려대학교 기업경영연구소가 실시한 병원 경영실태 조사에 따르면 제도 도입 전 관행수가의 50% 수준에서 진료수가가 책정된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1983년 병원협회가 전국 410개 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경영이 절망상태’라고 답한 병원이 55.7%에 달했고, 그 주된 요인은 낮은 보험수가 때문(65.4%)이라고 지적했다.

대한의사협회 경만호 회장은 “의료보험은 의사들을 ‘오라’에 묶은 격”이라며 “이 제도의 도입은 오늘날 의사들의 고난의 시발점”이라고 토로했다.

어찌 잊으랴, 여의도 함성

2000년 2월 17일.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여의도 문화마당에는 전국 수 만명의 의사들이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심정으로 운집했다. 의사들의 애끓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새천년 의료혁명으로 불렸던 의약분업은 강행됐고, 사상 초유의 의료계 집단 휴폐업 사태를 불러왔다.

의사들은 약사법 개정을 요구하며 가운을 벗고 진료현장을 떠났다.특히 전공의에 이은 의대교수들의 파업으로 전국 대형병원의 진료는 사실상 마비됐다. 개운찮은 의·약·정 3자의 합의로 의약분업 파동은 6개월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 후유증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정부가 그토록 강조한 대로 의약분업은 약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필연적 제도이지만 의료대란까지 치르고 시행된 의약분업에 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집단은 바로 의사이다. 의사들은 직업적 정체성을 송두리째 잃었으며, 환자 앞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기 어렵게 됐다. 특히 공익을 저버리고 이윤만 쫓는다는 사회적 비난이 마음 깊숙이 상처로 남았다. 당시 흰가운 대신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환자 곁을 떠나 투쟁을 벌이던 의사들의 모습은 국민들의 반감정을 샀고,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당시 의권쟁취투쟁위원회의 주역이었던 대한의사협회 김재정 前 회장은 “지금도 의약분업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너무나 많은 의사와 국민들이 잘못된 제도에 희생 당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벌거숭이 된 의료계

2000년대 들어 정부는 유리병 속 의사들을 아예 벌거숭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2004년 ‘의료기관평가’라는 제도를 도입, 의료기관들을 당혹시켰다. 민간기관에서 이뤄지던 평가가 있긴 했지만 정부 주도의 평가는 처음. 더욱이 평가결과를 전격 공개하면서 ‘병원 서열화 조장’이라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부의 공개정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6년 2월 의료기관의 항생제 처방률을 공개하더니 5월에는 주사제 처방률까지 공개했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산부인과 병의원의 제왕절개 분만률을 공개하면서 정부는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의료기관들의 정보를 국민들에게 흩뿌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연말정산 소득공제 내역은 이미 공개된지 오래고 최근에는 비급여 항목과 비용까지 모두 공개하는 법안이 시행돼 의료기관들의 한 숨이 깊어지고 있다.

주무부처인 복지부가 다양한 의료정보 공개의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바로 ‘의료 질 향상’과 ‘국민의 알권리’다. 항생제, 주사제, 제왕절개 분만율 등 폐단이 우려되는 항목들에 대해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의료기관들의 자정노력을 유도하고 국민에게 의료기관 선택권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의료계는 정부가 제창하는 명분에 회의적이다. 정부가 ‘국민’이라는 절대권력의 포장지로 사회주의 의료를 포장하려 한다는게 의료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대한병원협회 김철수 前 회장은 “의료의 질 향상과 국민 알권리 신장은 너무도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100% 순도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정부의 공개정책에 반감을 나타냈다.

범죄자(?) 낙인 찍히는 의사들

최근 언론지상에는 부쩍 ‘부당청구’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정부가 분기별, 요양기관 종류별, 유형별 등 수시로 병의원의 부당청구 실태를 언론에 공개하고 있기 때문.

이런 뉴스를 접하는 국민들은 의사집단을 여전히 ‘속물’ 취급하며 손가락질 하게 되고, 이는 의사에 대한 신뢰도 추락으로 이어지는게 수순이다.

정부는 부당청구 실태가 도를 넘어 경각심 차원에서 실태를 공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정작 뭇매를 맞아야 하는 의사들은 억울함에 가슴을 친다. 물론 부당청구는 잘못된 행위지만 고의성이 없는 실수까지 불법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게 의사들의 항변이다. 뿐만 아니라 부당청구가 적발될 경우 해당 의사나 의료기관에 대해 처분을 내리면 될 것을 모든이에게 공개하는 것은 의사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최근 ‘리베이트 척결’을 선언한 정부의 태도 역시 의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리베이트를 근절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이 의사의 처벌’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쌍벌제 도입을 추진하는 정부에 의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한의사협회 좌훈정 대변인은 “최근 정부는 의사들에게 범죄자의 낙인을 찍고 있다”며 “어느 국민이 범죄자를 믿고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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