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앞바다 누비는 젊은 의사 4인
2010.04.07 21:53 댓글쓰기
지난 3월 중순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항. 병원선이 정박한 통영해양경찰서 사천파출소 앞바다에 기러기 10여 마리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크고 작은 수십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이른 오전이라 항구는 비교적 한산했다. “혹시 서울에서 오신 기자분이신가요?” 병원선 취재에 동행하는 허 운 공보의사(28)가 말을 걸었다. 이어 김무현 공보의사(29)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햄버거가 들려있었다. “병원선에 같이 근무하는 공보의사가 또 있어요. 주려고 샀습니다.” 병원선은 162T(톤)급으로 항구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이동해 탑승했다.

이날 취재한 병원선은 경상남도 소유의 경남 511호. 길이 37.72m에 선폭은 7.5m에 달한다. 선장과 공보의사 4명(의·치·한), 간호사와 선원 등 총 15명이 승선했다. 병원선 내부에는 의과와 치과, 한의과 진료가 가능한 별도 공간이 마련됐다. 간단한 의료장비도 갖췄다. 약을 조제하는 약국과 휴게실도 있었다. 2층은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운항하는 별도 공간이다. 지하공간까지 고려하면 제법 규모가 크다. 승선이 끝나고 방송이 나왔다. 김홍규 선장(59)이 “출발하겠습니다. 물건을 결박하십시오”라고 지시했다. 파도가 높으면 의료장비가 흔들릴 수 있어 끈으로 충분히 고정해야 한다. 의료장비 관리는 공보의사들의 몫이다. “처음 배를 탔을 땐 멀미로 고생했어요. 1년 가까이 근무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하죠. 그래도 거제도처럼 멀리 나갈 경우 누워서 갑니다.” 김무현 공보의가 귀띔했다. 이날 병원선은 답포와 내지, 읍도를 거쳐 통영으로 귀항하는 코스를 돌았다. 오후에 급격하게 날씨가 흐려져 일부 일정을 취소한 게 이 정도다.

병원선에는 총 4명의 의사가 근무한다. 의대를 졸업한 공보의 2명과 치과의사 1명(방경환·29), 한의사 1명(권석동·32)이 군복무 대신 병원선을 탄다. 보통 1년 근무가 끝나면 나머지 2년은 육지로 근무지를 옮긴다. 병원선은 근무지 중에서도 가장 힘든 도서벽지로 분류된다. 때문에 자원자를 모집한다. 주요 임무는 배를 제외한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는 경남 소재 섬을 돌며 지역민을 치료하는 것. 공보의사는 한 달에 3주 정도 배를 탄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근무하면 총 15일가량 배에서 진료한다. 경남도는 병원선을 딱 1대 보유하고 있다. 병원선에 탑승하는 의사도 이들 4명이 전부다. 섬 주민들에게 다양한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의사와 치과의사, 한의사가 모두 탑승해야 한다고 한다. 의과는 환자가 가장 많다. 따라서 2명의 공보의 중 1명은 병원선에서 나머지 1명은 각 섬을 돌며 방문진료를 한다. 병원선이 제공하는 의약품은 모두 무료다.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병원선이 섬마을 사람들에게 반가운 이유다.

병원선 안마의자 인기…진료비는 무료
오전 9시가 훌쩍 넘어서 첫 번째는 목적지인 답포로 향했다. 얼마 안 가 배가 위아래로 몹시 흔들렸다. 흐린 날씨 탓이다. “배가 많이 흔들리네요. 보통 이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가 보네요. 이 정도면 배를 띄우지 않아요.” 방경환 공보의가 입을 열었다. “이거 거제도 급인데.(거제도는 거리가 멀고 해류가 강해 이동 시에 고생이 많다고 한다.) 이럴 땐 누워서 가는 게 상책이죠.” 허 운 공보의가 거들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기자와 달리 공보의들은 비교적 편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육지가 고향인 이들은 매번 배를 타는 것은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삼천포항을 떠난 지 40여분 후 답포에 도착했다. 병원선에서 ‘뿌웅’하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원선이 도착했다는 신호란다. 의과 공보의사 2명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허 운 공보의는 병원선에서 진료하고, 김무현 공보의는 방문진료에 나서기로 했다. 3분도 안 돼 주민들이 병원선에 올랐다. “손가락 관절이 시원찮아. 다른 관절도 별로야. 의사 양반 우리 아저씨 좀 봐봐.” 환자들이 오랜만에 만난 허 운 공보의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이게 효과가 비교적 좋은 약이에요. 어르신 관절은 마산이나 큰 병원에서 한번 진료를 받아보세요. 주사도 1대 맞으시고요.”

진료가 끝난 환자들은 곧장 안마의자가 있는 한의과 진료실로 향했다. 병원선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다. 조복자(여·55) 씨는 “어떤 자식이 이렇게 시원하게 안마를 해주겠습니꺼. 병원선에 들리면 안마의자를 꼭 찾는다”고 했다. 옆자리에 앉은 이재모(남·79) 할아버지도 “한 달에 한 번밖에 안와 아쉽다. 그래서 의사 선생이 늘 반갑다”고 했다. 답포 환자는 10명 내외로 한 시간 만에 진료가 끝났다. 다음 행선지인 내지로 떠나기에 앞서 공보의사들이 한의과 진료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경환 공보의는 “진료비는 모두 무료이며, 기초생활수급자가 많아 병원선을 반긴다”며 “섬사람들이라 성인병은 적지만 고혈압이나 근골격계 질환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허 운 공보의는 “어렵게 생활하는 분이 많으세요. 대부분 노인이고 젊은 사람은 몸이 불편한 사람이 많아 안타까울 때가 잦았다”고 했다. 권석동 공보의도 “섬 인구가 줄지 않지만 연령대가 급속히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며 “병원선 진료가 없으면 마땅한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곳이 이곳 섬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때 방문진료를 나갔던 김무현 공보의가 낙지를 들고 나타났다. “오늘은 운이 좋네요. 보통 간단한 요기 거리를 주시곤 하는데 오늘은 특별한 선물을 받았어요.” 다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늘 맛난 거 먹겠네.”라는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왔다.

"공보의는 의사이자 손자 그리고 말벗
내지에 도착한 후 김무현 공보의를 따라나섰다. 방문진료를 맡은 공보의는 섬마을 을 돌며 노인환자를 문진하고 약을 처방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오랫동안 봐온 얼굴이라 그런지 노인들이 특히 반가워했다. 이 때 공보의는 의사이자 손자, 말벗이 돼야 한다. 미소는 필수고 넉살은 장기가 돼야 한단다. 김 공보의가 한 달 만에 모습을 드러내자 두 할머니는 반갑다며 연방 손을 쓰다듬었다. “나 시집 갈기다. 다이어트하고 바로 갈기다.” 김수연 할머니(87)가 김 공보의에게 농을 건넸다. “그래서 이렇게 예쁜 옷을 입으셨어요. 근데 할머니 이번 달은 파스가 없어요. 약 드릴 테니 잘 듣고 챙겨드세요.” 김 할머니 옆에 있던 이원주 할머니(87)도 “난 (시집갈)날 받아났어. 그런데 아직 능력이 없어서 고민이야.”라고 말을 걸었다. 시집 안가냐는 김 공보의의 농담을 이 할머니가 되받아친 것이다.

귀가 어두운 또 다른 할머니는 김 공보의가 큰 소리로 설명을 해야 했다. 김 공보의는 “큰 소리로 말하면 목이 아프지만 이렇게 어르신들 뵙고 이야기 나누면 보람이 크다”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아름다운 섬 풍경을 볼 수 있는 특권도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어르신들 보면 고향 할머니가 생각나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다”며 “바다를 보면서 힘든 일 털어내고 보람을 찾는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방문한 곳에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리곤 커피와 과일을 내왔다. 반가움의 표시란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주사를 맞고 싶다고 했다. 이럴 땐 공보의가 두 번 걸음을 해야 한다. 세 번째 방문한 곳에서도 김 공보의의 목소리가 커졌다. 워낙 고령이다 보니 귀가 어두운 노인이 많아서다. 설명도 노인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수차례 반복했다.

방문 진료를 마치고 병원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 공보의가 한 가지 노하우를 알려줬다. “몰랐는데 이곳에는 글을 모르시는 어르신이 많아요. 처음에는 약봉지에 적힌 데로 드시라고만 했는데, 노하우가 부족했던 거죠. 이제는 알약 개수로 설명하거나 가족에게 별도로 설명을 합니다. 이게 글을 모르는 어르신들 자존심을 살려드리는 길이고요.” 오전 진료가 끝나고 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보통 통영에서 도시락을 공수해와 끼니를 해결하지만, 1주일에 1번 정도는 섬에서 먹는다. 이런 날은 반찬이 풍족해 호강하는 날이라고 한다. 김홍규 선장은 “기자 양반 오늘 호강하네. 기가 막히게 날짜 잘 잡았어”라고 했다. 김무현 공보의가 선물 받은 낙지가 점심식탁에 올라왔다. 식탁은 풍족했지만 점심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날씨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10여분 만에 식사시간이 끝났다. 서둘러 병원선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인 읍도에서는 날씨 관계로 별다른 진료가 없었다.

공보의사 4명이 한방 진료실로 모여들었다. 보통 이곳에서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흔들리는 배에서는 책을 읽기도 TV를 보기도 쉽지 않다. 공보의들은 진료 외 시간을 현명하게 쪼개서 쓰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병원선 공보의의 필수품은 아이폰이란다.


“병원선 근무 자랑스러워”
이야기 화젯거리는 병원선 근무 1년이 되는 다음 달에 근무지를 어디로 배정받느냐 여부다. 마산이 고향인 권석동 공보의를 제외한 3명은 모두 부산출신이다. 공보의를 마치고 어떤 진료과로 레지던트 수련을 받느냐도 주요 관심사다. 여느 젊은 의사 들과 고민이 다르지 않았다. 1년을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다 보니 다들 직종에 상관없이 정(情)이 깊은 듯했다.

병원선이 다시 움직였다. 최종 목적지인 통영으로 귀항하기 위해서다. 날씨가 더욱 흐려져 배가 더 요동쳤다. 일부는 피곤한 듯 지쳐 쓰러졌다. 움직이는 배 안에서는 피로감이 쉽게 온다. 통영으로 돌아오는 1시간이 조용했다. 방경환 공보의는 “경남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에요. 전라도 공보의들은 1주일 동안 배에서 먹고 자면서 땅 밟아볼 기회가 적으니까요. 힘들지만 아름다운 남해를 돌아다니면 진료할 수 있어서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허 운 공보의도 말했다.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합니다.

옛날에 섬에 인구가 많을 때는 병원선에 타는 의사도 전문의였죠.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진료합니다. 의료시설이 낙후된 이곳 섬사람들에게 병원선은 정말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 중심에 제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네요.” 이렇게 병원선의 하루 일정이 마무리됐다.

단체사진을 찍은 항구에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배가 출항한 1년 중 날씨가 고약한하루였다고 한다. 이들 공보의는 근무시간이 끝난 뒤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이곳 통영에 돌아오고 또다시 일주일 동안 병원선을 탄다. 오는 5월이면 경남 511호에 새로운 공보의 4명이 탑승할 것이다. 이들 역시 섬 노인들과 웃고 진료하며 교감한다. 그렇게 경남 앞바다를 누비는 젊은 의학도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을 전망이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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