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의료전달체계史'
2010.07.07 21:00 댓글쓰기
[기획 2]매년 대한의사협회 시도의사회 정기총회 때마다 의료계는 올바른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외치는 목소리로 들끓는다. 도입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 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개원했을 때 즈음 ‘의료전달체계는 이미 붕괴됐구나’하고 혼자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손 쓸 방법이 없다.

의료전달체계란?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과 함께 등장한 의료전달체계는 의료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의료서비스를 적시에 적정인에 의해 적소에서 적정진료를 필요로 하는 국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려된 제도 로 정의된다.(양재모, 유승흠 1994, 국민의료총론)

도입 목적

당시 의료전달체계 도입은 1920년 서양에서 시작된 의료의 지역화 개념에서 출발했다. 자본집약적인 3차 의료를 중심으로 주변에 1차와 2차 의료를 분산시켜 지역 네트워크로서 소비자의 보다 높은 참여, 보다 향상된 의료 접근을 꾀하고 있다. 이러한 출발선상에서 우리나라는 의료전달체계의 도입 목적을 크게 세 가지로 잡았다.
우선 종별에 따른 의료기관의 기능을 구분하고, 단계적 진료체계를 확립시켜 환자 의뢰체계를 구축하는 게 1차적인 목표였다. 이를 통해 정부는 의료의 계속성을 확보하고 환자들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제공자로부터 적절한 진료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둘째는 당시에도 사회적 이슈가 됐던 의료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의료자원의 지역 간 불균형이 문제가 됐던 1989년 지역 간 균형을 이루고 지역 내 의료의 자체 충족도를 높이자는 뜻에서 공급자인 의사들의 안전망 구실을 하기를 희망했다.

마지막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의료공급 효율성 향상에 따라 의료비 절감, 건보재정 안전성을 도모할 것으로 내다봤다.

제도 면면

의료전달체계는 전국을 8개 대진료권과 140개 중진료권으로 구분, 가급적 지역내 의료기관을 유도하는 방향을 설정됐다. 이를 위해 의료전달체계는 형식적으로 1차와 2차, 3차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게 됐지만 현실적으로 환자가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1차와 2차 진료기관으로만 구분돼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건강보험의 요양급여체계가 1·2차 의료기관이 1단계 진료기관으로 묶고 3차 의료기관을 2단계 진료기관으로 나눠놓은 탓이다. 이 때문에 2차 의료기관으로서는 1차 의료기관과의 차별적 전략을 수립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고, 상위 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돼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의료전달체계 붕괴 부추기는 예외조항

3차 의료기관에서 받는 2단계 진료는 1단계 의료기관에서 발급한 요양급여의뢰서가 없으면 원칙적으로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의료전달체계를 무색케 하는 예외조항들이 남아 있어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3차 의료기관에서 환자들이 곧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3차 의료기관 종사자가 자신이 속한 기관에서 진료를 받을 경우 1단계 진료기관을 거치지 않아도 무방하다. 또한 3차 의료기관에서 응급진료를 받는 경우, 분만을 하는 경우, 혈우병 진료를 받는 경우도 모두 예외사항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치과, 재활의학과, 가정의학과에서 진료를 받는 경우다. 의료계에서는 이를 두고 시쳇말로 ‘뒷구멍’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3차 의료기관에서 외래를 늘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이다.

의료전달체계 영향 미친 사건들

#1. 진료권 범위 개선 = 의료전달체계가 도입된 지 이듬해인 1990년 보건사회부는 의료전달체계 시행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제도 개선에 나섰다. 의료전달체계의 주요 골자였던 진료권범위를 대폭 재조정키로 한 것이다.

당시 보사부 관계자는 “현행 의료전달체계상의 진료권을 재조정하는 것은 제도 도입 이후 환자들이 대규모 종합병원으로 몰리는 현상은 다소 줄었으나 진료권이 시·도군 등 현행 행정구역 위주로 구분돼 많은 주민들과 의료기관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2. 전달체계 개선 논의 불 붙다 = 의료전달체계 도입 1년째인 1990년 8월, 보건사회부는 의료전달체계 운영평가를 위해 진료시간과 비용 등에 관한 일제조사를 실시해 1991년까지 개선책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의료전달체계가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차 의료기관으로 쏠리는 환자들의 발길을 막지 못했던 게 주요 이유였다.

#3. 의료전달체계 실효 없다 = 의료전달체계가 도입된 이후 꾸준히 그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1992년 당시 강남성모병원이 실시한 1981년과 1991년 사이 외래 환자 추이에 대한 분석에서 3차 의료기관을 찾는 환자수가 의료전달체계 실시 이후 오히려 7.1% 증가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더욱이 이들 환자 가운데 73%는 3차 의료기관을 찾지 않아도 될 경증환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4. 동네의원 몰락 = 90년대 후반부로 갈수록 의료전달체계의 왜곡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의료기관의 양극화도 서서히 심각해져 갔다. 1996년 의료보험연합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차 의료기관의 진료건수와 진료비는 의료전달체계 도입 당시보다 각각 119.5%와 175.5%나 늘어난 반면 1차 의료기관은 45.2%와 76.6%에 증가하는데 그쳤다. 특히 98년에는 진료권 개념마저 없어지면서 남아 있는 진료의뢰 제도마저 정착되지 못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5. 정부, 차등수가제 칼날을 뽑다 = 도입 10년만에 사실상 있으나 마나해진 의료전달체계. 정부는 이를 바로세우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1999년 복지부는 2000년부터 1~3차 의료기관관별로 적정한 진료행위를 규정, 수가를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질병별 차등수가제’를 실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복지부가 당시 밝힌 차등수가제는 질병 또는 진료행위를 1~3차 진료기관의 기능에 따라 분류한 뒤, 기능에 적합한 진료를 했을 때만 적정수가를 책정해 지급하고, 적합하지 않은 경우 하향 책정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 내세운 정책이었지만 향후 의료계의 숨통을 옥죄는 대표적인 규제정책으로 사실상 돌변하게 된다.

#6. 의약분업 대란 =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됐다손 치더라도 2000년까지는 그래도 1차 의료기관들은 숨을 쉴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해 의약분업이 시행되면서 의료계는 거리로 나서 투쟁을 이어나가게 된다. 당시 의료계는 의약분업 시행에 따른 대책으로 의료전달체계만이라도 바로 세워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정부의 정책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그대로 의약분업은 강행됐다.

#7. 1·2·3차 종별기능 재설정 = 복지부는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 의료기관의 종별에 따른 고유 기능설정을 핵심으로 봤다. 복지부는 의원과 같은 1차 의료기관은 외래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진료와 질병에 대한 상담과 2차와 3차 의료기관에 대한 안내를 맡도록 했다. 2차 의료기관은 응급병원, 요양형 병원, 전문병원 등으로 특성화하려는 작업을 시도했다. 또 3차 의료기관은 고난도 진료기관으로써 교육과 연구를 주축으로 외래진료를 점차 축소하는 방향으로 유도키로 정책 목표를 세웠다.

#8. 개방형병원제 도입 물꼬 = 의료전달체계 붕괴로 1차 의료기관이 3차 의료기관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몰락 양상을 보이자 복지부는 2001년 개방형 병원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형병원의 유휴 의료장비와 시설을 동내 병의원의 개원의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이 제도는, 개원가의 의료장비 구입 절감과 1차 의료기관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복지부는 믿었다.

#9. 새로운 형태 전달체계 구축 논의 = 2004년 당시에도 이미 경영난이 심각했던 전국중소병원협의회는 의료전달체계를 새롭게 짜보자는 논의를 펼쳤다. 1~3차에 이르는 의료기관 구분이 이미 무의미해진 만큼 요양급여상의 진료기관 구분과 마찬가지로 1차와 2차를 하나로 묶고 3차 기관을 2차 기관으로 분류하는 새로운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자는 의견을 내놨다.

#10. 대학병원 가려면 돈을 더 내라 = 의료전달체계 붕괴로 고심하던 복지부는 2008년 대학병원 외래환자의 본인부담률 인상 방안을 확정지었다. 그동안 50%였던 본임부담률을 10% 늘려 60%로 책정한 것이다. 당시 복지부는 “경증이나 단순 만성질환자의 대형병원 쏠림현상을 막아 의료전달체계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한 조치”라며 그 대상을 앞으로 늘려나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11. 그리고 오늘 = 보건복지부는 지난 2009년 12월 무너져 버린 의료전달체계를 되살리기 위해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TF’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논의에 나섰다. 대한의사협회 역시 2010년 1월 ‘의료전달체계 제도개선 TF’를 구성하고 의협 의료정책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특히 전재희 복지부 장관이 ‘의료전달체계 복구’를 금년도 하반기 보건복지분야 핵심과제로 제시하며 그 어느 때 보다 의료전달체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전 장관은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쏠림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상급종합병원의 외래 본인부담률을 현행 60%에서 70%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 환자는 동네의 단골의사를 지정, 지속적인 관리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해 1차 의료기관 역할 강화에 힘쓰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오랜만에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는 정부와 의료계가 한계의 문턱에 봉착한 의료전달체계에 어떤 처방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여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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