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춥고 힘든 겨울 보내는 외국인 노동자들
2009.12.30 03:11 댓글쓰기
흩어졌던 가족들도 함께 모여 정(情)을 나눈다는 연말연시다.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건강하게 새 해를 맞길 바라는 마음은 남녀노소·국적불문일 것이다. 친구, 가족, 동료의 따뜻한 마음이 모이는 이때 질병으로 고통받는, 게다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의료 혜택에서 제외돼 유달리 추운 연말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그들에게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을 28일 찾아가봤다[편집자주].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위치한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대표 김해성·이하 의원)[사진]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간다. 큰 외투로 팔과 옆구리를 감싼 그와 함께 들어선 의원에는 이미 30명 가까이 되는 외국인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하다가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수술을 받았어요. 약 먹은 후 위와 폐가 갑자기 나빠졌어요. 지금은 폐가 아파 일도 못해요. 좀 나아지면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해야 할 텐데….”

의원 앞에서 만난 슈트라(39.남)씨는 방글라데시에서 5년 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요즘 “폐병으로 고생하다가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약물 부작용 탓에 위에 천공이 생겨 폐에까지 무리가 왔다”는 설명이 계속됐다.

슈트라씨는 “이 곳은 물리치료, 진료 모두 무료”라며 “파키스탄, 네팔 친구들도 이곳에 많이 온다”고 전했다.

중국 흑룡강 지역에서 온 조선족 심영순(46.여)씨 역시 “무료 진료라는 조선족 언니 말에 이 병원을 찾아왔다. 김포에서 오는 사람도 더러 봤다”며 무상 혜택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거듭 호소했다.

그녀는 “가사도우미로 한 가정집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귀도 계속 아프고 두통도 심하고 눈도 너무 안 좋았지만 한국 온지 1년 반 만인 오늘 처음으로 병원에 온 것”이라고 토로했다.

“보통 진료비가 15~20만원이고 약값까지 따로 지불하면 너무 비싸다고 해 도저히 일반병원에 갈 수 없었다”고 심영순씨는 설명했다.

현재 의원을 찾는 중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러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노동자 중 70% 이상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상태이다. 불법체류 신세든 합법적 비자를 받은 사람이든 외국인노동자로 묶인 그들에게 의료보험은 말 그대로 ‘제도’일 뿐인 것이다.

중국 길림성에서 온 유춘근(55.여)씨는 “동생이 얼마 전 이곳에서 고관절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현재 한 대형병원에 입원했는데 오늘은 동생 혈액검사결과를 받아가려고 왔다”면서 “여기서는 수술이 안 된다고 해 큰 병원에서 하기로 했지만 비용이 너무 막막하다”며 울먹였다.

그녀와 동생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상황으로, 현재 상일동 비닐하우스에서 야채 재배를 하며 근근이 번 돈의 대부분을 병원비에 고스란히 내 놓아야 할 형편이다.

의원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맡고 있는 심승혁 공중보건의사[사진]는 “여기에 오는 외국인노동자들 중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면서 “이곳에서 수술이 안 될 경우 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소견서를 써주고 있지만 그 비용이 너무 비싸 치료받지 못하거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며 의료 제도의 실태를 전했다.

그는 “산부인과는 중환자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초음파 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두건 정도 암과 같은 중병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료를 받고 본인에게 결과 확인 등을 체계적으로 해줄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료라는 생각에 결과에 소홀하거나 직접 확인하지 않아 큰 문제가 될 때도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삶의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는 고단함에 제 몸을 돌보거나 제도적인 혜택을 살피고 누릴 여유는 그들에게 사치인 셈이다.

김해성 대표[사진]는 “과거 10년 동안 외국인 인권 문제 등을 상담해 오면서 노동자들이 사망할 시 장례문제나 보상절차를 대신 해주기도 했다. 약 1500~600명의 장례를 치렀는데 이 과정에서 어처구니없이 죽음을 맞게 된 사연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의원의 시작 역시 외국인노동자들의 의료 환경 실태에서 비롯됐음을 시사했다.

김 대표는 “외국인노동자 의료 문제는 정부 사업 범주에서 완전히 제외된 영역”이라면서 “현재 외국인 체류자 수가 120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데 이들을 우리사회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 거주 외국인노동자들은 약 22만 명이며 국제결혼에 의한 다문화가정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일민족 깃발을 언제까지 내걸 수 있을지 아니면 다민족 사회를 인정하고 첫 단추를 어떻게 꿰어 나갈지 고민하는 것이 남겨진 과제라는 뜻이다.

김해성 대표는 “정부 지원이 전혀 없이 후원금에 의존해서 민간단체가 의원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엄청나게 불안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라면서 “소액기부자를 포함해 기업들의 후원 등 후원 시스템을 정비해 나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전했다.

하루 평균 환자가 200여 명이고 개원 5년 반을 넘긴 의원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다름 아닌 30병상을 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는 고통, 재정 문제라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가리봉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 곳 의원의 꿈은 운영비 문제를 넘어 더욱 원대하다.

김 대표는 의원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첫마디로 “준종합병원을 만들 것이다”라고 단호한 의지를 피력했다. “응급실이나 야간진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름표 탓에 분쟁이 끊임없지만 전문 인력을 보충해 질병 치료 시스템을 견고히 한다면 가능도 할 것”이라고 기대를 내비쳤다.

준종합병원의 가능성 여부는 결국 돈 문제로 회귀될 것이라는 말에 그는 끝으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정부도 손을 놓았지만 누군가는 고민하고 해야 할 몫이다”고 대답했다.

중국 심양에서 온 사석균(55.남)씨의 다음의 이야기가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렸던 이유도 '누군가는 고민하고 해야 할 몫',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에 온 이후 계속 몸이 좋지 않았지만 병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왔는데 몸이 아파 이 곳에서도 살 수 없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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