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 많은 한국 병원사, 그때를 아십니까?
2010.02.18 21:51 댓글쓰기
[기획 上]1959년 7월 2일. 現 국립의료원의 전신인 국립중앙의료원 현관 앞에 전국 68명의 병원장들이 도열을 이뤄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 한 컷은 대한병원협회가 그 모습을 세상에 처음 드러낸 시발점이 됐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 병원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당시 132개에 불과하던 병원수는 50년이 지난 2009년에 2234개로 늘어났고 병상수 역시 99개에서 3739개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병원계는 수 많은 고난의 순간을 넘나들어야 했다. 특히 건강보험 도입이 시작된 1975년 이후 정부의 규제 일변도 정책에 병원들은 울분을 삭혀야 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대한병원협회 창립 50주년.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이 시간동안 대한민국 병원들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병원계 영욕의 역사를 들여다 봤다.[편집자주]

최초의 병원노조, 그리고 파업

1963년 우리나라 의료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된 세브란스병원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해당병원은 물론 ‘노조’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당시 병원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 노동쟁의 직후 서울시내 병원장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함께 대책을 고민했다.

복지부 역시 병원의 노동조합 결성 현황과 성격 등에 대해 정보를 취합하는 등 세브란스병원의 첫 노동쟁의는 병원계는 물론 정부 당국까지 긴장시켰다.

‘노조의 위력(?)’을 직감한 병원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고 있는 곳인 만큼 병원은 노동법의 예외로 취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전전긍긍했다.

병원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고 이후 병원노조는 활성화 됐고 병원들은 그로 인해 수시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병원노사 갈등이 극에 달하던 1990년대 병원이 필수공익사업에 포함되면서 병원들은 파업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야간에 병원 문을 두드리다

구급환자진료센터 설치문제는 1960년 6월 서울시 당국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당시 만해도 ‘응급실’이란 개념이 없어 환자들은 밤에 몸이 아프면 병원 문을 두드려야 했고 이러한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서울시가 병원들의 협조를 구하고 나선 것.

하지만 병원계는 여건상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구급환자진료센터 설치를 거절했다.

개별병원으로서는 구급환자진료센터 운영이 불가능한 만큼 서울시가 전문적인 구급병원을 개설하고, 그에 따른 의료시설, 전문의사 배치 등 모든 조건을 완비해 24시간 진료체계를 운영하라는게 당시 병원계의 입장이었다.

대한병원협회가 보건사회부에 보낸 건의서에서도 “현재 각 병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응급차의 차출 문제는 극히 불가능한 형편”이라며 난색을 표했고 결국 구급진료센터 설립 문제는 한 참 후에야 재논의가 이뤄졌다.

‘새마을진료’ 기억하십니까?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1970년 초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범국가적으로 시행됐던 새마을운동에 병원계도 동참한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당시 대한병원협회는 당국으로부터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새마을 진료사업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받고 의료봉사 형태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

새마을 진료사업의 내용은 영세민 약 20만 명을 의료기관들의 능력에 따라 무료로 진료하고 비영리의료기관은 영세환자 무료진료 또는 거주지역의 영세민을 대상으로 순회 진료에 협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2년 8월 2일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사립의료기관 새마을사업 발대식을 거행하고, 무료진료 대상자에게 배부할 새마을진료권을 당국에 전달했다.

하지만 1974년 당국은 새마을진료를 자발적 참여에서 의무사항으로 바꾸고 병원들에게 무료진료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무료진료 실시결과를 의료감시 대상으로 지정해 불성실 사례가 발견되는 경우 이를 공개적으로 보도하고 법규에 저촉되는 경우 업무정지 및 개선허가 취소 등 행정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병원들은 즉각 반발했고 2년 후인 1976년에서야 자선진료, 순회진료, 기타 무료진료사업을 체계화하는 서민진료시혜 확대 방안으로 개편되면서 강제진료 논란은 수글어 들었다.

공보의 효시, 파견수련제도

군입대를 앞둔 남자 의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공중보건의사. 하지만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공보의는 선택의 영예가 아닌 의무사항이었다.(물론 병역의무와는 무관하다)

시•도립병원 및 일부 지방 의료기관들의 의사요원 확보난이 심각해지자 당국은 1970년 12월 24일 일명 ‘수련의 파견수련제도’ 시행에 들어갔다.

레지던트 수련과정의 일부로 수련기간 중 6개월 이내에서 보사부 장관이 정한 무의촌 지역에 파견을 나가도록 규정을 만든 것.

그러나 수련의 파견수련제도는 국민보건의료의 향상과 수련의 현지실습기회를 부여한다는 정책사업의 하나로 도입됐지만 실시 1년 만에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지의료기관의 시설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교육여건, 행정체계 다원화로 인해 초래되는 진료업무의 혼란, 수련의사게 대한 처우문제 등이 동시에 불거져 나온 것.

병원계는 무의촌 파견수련의사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자매결연을 맺은 무의촌 지역에 수련의를 계속 파견하는 지정파견제 도입 등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결국 이 제도는 1978년 12월 5일 '국민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공중보건의사 제도로 바뀌면서 10년도 채 되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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