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째 혹독한 수난 한국 병원계
2010.02.19 21:53 댓글쓰기
[기획 下]1959년 7월 2일. 現 국립의료원의 전신인 국립중앙의료원 현관 앞에 전국 68명의 병원장들이 도열을 이뤄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 한 컷은 대한병원협회가 그 모습을 세상에 처음 드러낸 시발점이 됐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 병원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당시 132개에 불과하던 병원수는 50년이 지난 2009년에 2234개로 늘어났고 병상수 역시 99개에서 3739개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병원계는 수 많은 고난의 순간을 넘나들어야 했다. 특히 건강보험 도입이 시작된 1975년 이후 정부의 규제 일변도 정책에 병원들은 울분을 삭혀야 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대한병원협회 창립 50주년.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이 시간동안 대한민국 병원들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병원계 영욕의 역사를 들여다 봤다.[편집자주]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다

대한민국 병원사의 가장 중차대한 사건은 바로 ‘의료보험제도 도입’이었다.

의료보험제도 실시 전에는 병원들이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지만 시행 이후에는 엄청난 통제와 시련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병원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977년 7월 1일 전국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전격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했다.

제도 시행에 앞서 당시 보사부는 병원들에게 의료보험제도의 핵심인 진료수가안을 제시해 달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는 관행수가의 60% 선으로 정해졌다.

당시 의료보험수가가 얼마나 불합리하게 책정됐는지는 의료보험제도가 본격 실시된 1년 후의 각종 병원 경영실태조사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실제 1979년 고려대학교 기업경영연구소가 실시한 병원 경영실태 조사에 따르면 제도 도입 전 관행수가의 50% 수준에서 진료수가가 책정된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1983년 병원협회가 전국 410개 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경영이 절망상태’라고 답한 병원이 55.7%에 달했고, 그 주된 요인은 낮은 보험수가 때문(65.4%)이라고 지적했다.

의료보험제도와 안보

의료보험제도 강행 뒤에는 정부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 의료보험이 실시되기 전 병원계가 제도시행에 따른 부작용의 가능성을 들어 반대하자 정부 측 인사로 나온 한 대학교수의 말에서 그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1977년 4월 22일 앰베서더호텔에서 열린 대한병원협회 제18차 정기총회에 나선 이 교수는 “안보적 차원에서라도 병원계가 의료보험제도 실시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 회의석상에서 북한대표가 입원보증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죽은 환자에 대한 기사를 거론하며 “이런 점을 보더라도 북한이 남한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

당시 보사부 장관을 지낸 신현확 전 국무총리 역시 의료보험제도 도입에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됐음을 뒤늦게서야 인정했다.

신혁확 전 총리는 1986년 병원회보의 창간 특집 인터뷰에서 “그때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적당한 시기를 봐 수가를 정상화할 계획이었지만 여의치 못했다”고 술회했다.

노스트라다무스 버금가는 병원들의 예언

주목할 점은 정부 정책이 나올 때마다 병원계가 우려했던 일련의 부작용들이 훗날 너무나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사실이다.

먼저 병원계는 의료보험제도 도입에 앞서 △대형종합병원으로의 환자 집중화, △의사 1인당 처리 환자수 폭증에 따른 의료 질 저하, △저렴한 진료비에 따른 과다한 검사 속출, △보험수가 결손분에 대한 환자 부담 등의 부작용을 예견했고 이는 정확히 적중했다.

의료보험제도 도입으로 의료기관 문턱이 낮아지면서 환자들이 폭주했고 특히 의료진과 시설이 좋은 대형종합병원으로의 모여들기 시작했다.

또 늘어난 환자로 인해 의사들이 환자를 대강 진료할 수 밖에 없어 진료의 정확성이 떨어졌고 이는 곧 환자들의 불만과 불신을 야기시키고 말았다.

또 일선 병원에서 저수가로 인해 손해 본 부분을 각종 검사와 투약 등을 활용, 환자들에게 전가시키려는 폐단까지 생겨났다.

의료보험제도와 함께 병원들의 굴곡의 역사로 꼽히는 의약분업 역시 병원들의 예언이 적중했다.

병원들은 원내약국을 폐지할 경우 국민의 불편이 가중될 뿐 아니라 불필요한 조제료 신설로 인한 건강보험재정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고 그 결과는 현재 국민과 정부, 병원 모두 실감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최근에도 심심찮게 불거져 나오는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의 ‘병원신임업무’를 둘러싼 갈등은 4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공의 정원책정과 수련병원 지정 등을 담당하는 병원신임업무는 1966년 9월 3일 병원협회가 보건사회부로부터 위임받아 관장하게 된 사업이다.

그러다가 1971년 의사협회가 병원신임업무를 의협으로 이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병원신임업무 이관을 둘러싼 공방이 시작됐다.

병원협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병원신임업무의 이관은 불가하다’고 결의, 의사협회 측에 이를 전달했지만 의협의 신임업무 이관 주장은 계속됐다.

의협은 복지부 장관에게 수련업무의 이관을 직접 건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발끈한 병협이 장관을 방문,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는게 기본방침’이라는 확답을 받으면서 일단락 됐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의협은 수시로 신임업무 이관 문제를 거론하며 병협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 공방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공염불에 그친 리베이트 근절

최근 의료계가 리베이트 문제로 시끄럽지만 이를 근절하려는 병원계의 자정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개됐다.

1990년을 즈음해 일부 의료인의 부동산 투기, 호화 사치 풍조, 의약품 랜딩비 및 전공의 모집 비리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병원계 신뢰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를 계기로 병원계는 정화 노력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고 1993년 3월 병원부조리 시정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같은 해 전국 병원장들은 ‘우리 병원인들은 의약품 및 진찰재료의 부당한 거래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하며 리베이트 근절 의지를 다졌다.,

또 병원인 의식개혁의 자율적인 쇄신운동 추진방안으로 ‘부당한 금품수수 배제운동’을 병원 전체행사로 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원협회는 ‘우리 병원은 부당한 금품을 받지 않숩니다’ 등의 표어를 제작, 전국 병원에 배부했으며 국민 불신해소를 기대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에 가입,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자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원계 리베이트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최근 정부가 사정의 칼날을 세우면서 근절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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