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왕 의사 시대' 막(幕) 내리다
2009.09.20 13:05 댓글쓰기
[기획 1]오는 23일(수) 국내 의학계 처음으로 의사국가시험(이하 국시)에 실기시험이 도입돼 시행된다. 오랜 준비기간 차질 없이 진행된 만큼 의학계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는 순간이다. ‘일차 의료를 수행할 수 있는 의사를 만드는 것’을 교육 목표로 교수와 학생은 하나가 되어 ‘이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대하고 있다. 지식만을 평가하는 기존 국시의 한계점을 보완하기 위해 실기시험의 필요성이 대두된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의학계는 크고 작은 토론을 통해 ‘실기시험’ 도입을 추진해 왔다. 의학 100년사 첫 의대생 실기시험.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데일리메디가 이를 짚어봤다.[편집자주]

‘3월엔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주사 맞는 것을 피하라’는 말이 있다. 갓 면허를 딴 ‘초짜 의사’들이 응급실을 비롯한 병원 여러 과(科)에 배치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신출내기 의사들은 혈관을 찾지 못해 수십차례 주삿바늘을 찔러대고, L튜브로 콧줄 끼우기에 번번이 실패하며 환자나 보호자를 격분케 하는게 다반사다.

병원에 접수되는 민원 중 불친절한 태도와 함께 믿음을 주지 못하는 의사의 의료행태가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니, ‘3월 응급실 기피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환자들이 서투르고 어설픈 의사들과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충분한 임상 기술을 익히지 않은 채 의사 가운을 입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 의사는 의대 시절 병원으로 실습을 나가기는 하지만 비의사 신분인 만큼 직접 환자를 대하지 못하고 선배 의사가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 의사면허증을 취득하더라도 환자진료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이다.

결국 이들은 임상경험을 쌓기 위해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고, ‘진짜 의사면허’라 불리는 전문의 자격증을 딴 후에야 진료일선에 나서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보건복지가족부가 올해 의사 국가고시부터 필기시험과 함께 80여 항목에 걸친 실기시험을 처음 치르기로 했다.

의사 국가고시가 시행된 1952년 이후 정확히 57년 만에 임상수행능력을 평가하는 실기시험이 처음 도입된 것이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구미 선진국에서는 의사 면허시험에 실기시험이 이미 포함돼 있다. 이웃 일본도 의대 졸업 후 2년 이내 실기시험에 합격해야 진료나 개업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에 비춰볼 때 국내의 의사국시 실기시험 도입은 늦은 감이 없지않다.

그동안의 국시는 지식수준 평가, 그것도 암기한 지식의 회상능력을 평가하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의사면허를 받고도 임상 기술이 부족해 진료를 잘 하지 못하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단순 기술측정 무의미…자질 평가 방안 마련돼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국시의 문항을 단순 암기형에서 문제해결 형으로 전환하는 등 시험문항의 내용과 형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부족한 임상수행 능력에 대한 부분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의대생들에게는 발등에 불인 국시합격을 위해 임상실습 보다는 도서관에서 문제집을 붙들고 국시 대비에 열을 올려온게 사실이다.

매년 1월 ‘의사국시 합격률 100%’를 외치는 각 의과대학들 역시 진료능력을 갖춘 의사를 양성하는 곳이 아닌 의사국시 합격을 위한 입시학원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하지만 의사국시 이래 첫 실기시험 도입에 따라 지금까지의 이러한 씁씁한 단상은 서서히 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 벌써부터 각 의과대학들은 임상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등 교육시스템 전반에 상당한 변화가 잇따르고 있다.

복지부는 의사국시 실기시험 도입으로 환자 중심의 교육이 되고 의사 불신을 해소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의사국시 실기시험 도입은 복지부가 그리는 이상을 향한 5부 능선을 넘었을 뿐이라고 진단한다. 천신만고 끝에 실기시험을 도입한 것은 박수를 받을만 하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서울의대 신희영 교무부학장은 “실기시험에서 단순히 기술만 측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의사로서의 자질까지 평가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연세의대 손명세 교수(의료법윤리학과)는 “의사고시부터 의학도들이 환자를 얼마나 존중하고 신뢰감을 주는지, 마음가짐과 태도를 면밀히 지켜보고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각 술기의 수행방법에는 각 대학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어 국시를 대비하는 학생지도에 어려움이 있는 만큼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임상수기 표준지침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영남의대 하정옥 교수는 “의사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해 도입되는 실기시험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평가기준 설정이 담보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기시험에 대한 이런 우려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일선 학원가에서는 벌써부터 족집게 과외 등 ‘합격 지상주의식’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각 의과대학은 실기시험에 대비, 정기적으로 예상문제를 학생들에게 공지하고 있으며 일부는 TFT까지 꾸려 실기시험 합격률 향상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특히 의사국시 재수생과 일부 재학생들을 겨냥한 실기시험 사교육 시장이 꿈틀대기 시작하는 등 학교 안팎으로 심상찮은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57년 의사국시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실기시험이 의사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회복하는 첫 걸음이 될지, 아니면 단순히 의사면허 취득을 위한 또 하나의 관문 쯤으로 여겨질지, 모두가 지켜볼 일이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11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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