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회장 출사표 던졌던 4인 그들은…
2009.09.29 21:59 댓글쓰기
[특별초대 상]올해 봄, 이들은 뜨거웠다.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서로를 향해 맹렬히 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어떻게 의권(醫權)을 수호할 것인가를 한결같이 고민했지만 제시한 해법은 제각기 달랐다. 과열경쟁에 따른 비방전이 난무하며 수 차례 선관위의 경고가 내려졌다. 동문 출신의 후보들은 단일화 문제를 두고 반목이 형성, 불편한 분위기 속에 선거를 치러야 했다. 또 생소한 인물의 출마와 현직 회장과 의장의 동시 출마 등 이번 선거는 치열한 열기 만큼이나 풍성한 얘깃거리도 많았다. 직선제 특성상 개표일까지도 윤곽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시종일관 ‘녹사수수’(鹿死誰手·승패를 결정하기 어려운 지경) 분위기 속에 진행됐던 의협회장 선거. 이제는 치열했던 선거전은 가슴 저만치 묻어두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는 4명의 낙선자들. 제36대 대한의사협회 회장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던 전기엽(기호 1번), 주수호(기호 3번), 김세곤(기호 4번), 유희탁(기호 5번) 전 후보를 데일리메디가 만나봤다.[편집자주]

전 기 엽(용산 121병원 미8군 내과의사)

‘기호 1번’ 전기엽 전 후보를 만나기 위해 서울 용산에 위치한 미군부대를 찾았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방문자 대기실에 들어선 순간, 주위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이 흥미로워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곧 낯익은 얼굴의 전기엽씨가 나타나 낯선 공간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그는 지난 봄 치열했던 대한의사협회 선거운동 기간이나 지금이나, 이곳 121병원에서 미8군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는데 여긴 뭐 하러 오셨어요.”(웃음) 멋쩍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한 전기엽씨는 대뜸 이 말부터 꺼내곤 “라면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반갑게 고개를 끄덕인 기자는 전씨가 버섯과 고기를 넣고 조리한 이색 라면을 먹으며 생애 첫 ‘라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씨는 지난 2월 중순 의협회장 후보자 5명 중 처음으로 등록을 마쳐 가장 먼저 언론에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지난해 말 미국 존스홉킨스에서 보건의료정책 석·박사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한의사협회장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전북의대 출신의 잘나가는 개원의였던 전씨는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오를 때부터 의협회장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의협회장이 되기 위해 세계 최고의 보건대학에서 의료정책을 공부해야겠다는 판단에서다.

“터무니없는 공약이었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출마 이후 전씨는 선거캠프 없이 단독 유세를 펼치며 연일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웠다. 전국적인 타운홀 미팅을 개최해 국민들의 공감대를 넓히겠다거나 미국 볼티모어 및 아프리카·남미 등지에 한국의사들이 근무하는 병원을 만들겠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전씨가 제시한 공약들은 좋게 말하면 신선하고, 나쁘게 말하면 터무니없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의도는 좋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현실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토론회가 생중계된 사이버공간에서는 그를 ‘허경영’에 빗대 조소하는 분위기마저 연출됐다.

“제가 세계에 병원 100개를 만든다고 하니 사람들이 꿈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땅히 그게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믿고 있죠. 제 공약이 마음에 든다며 지지해준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고요.”

현실화할 수 있는 공약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표를 찍어준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그는 선거에서 총 1406표(7.7%)를 얻어 5위를 가뿐이 제치는 ‘이변’을 연출했다. 득표율 10%를 넘기지 못해 기탁금은 돌려받을 수 없었지만, 아쉬움은 없다고 전씨는 말한다.

“선거라는 것을 겪어보니 후보자가 내세우는 공약과는 상관없이 조직이 있고 그래야 되는 거더라고요. 치르고 나서 든 생각은, 우리나라에서 내가 설 땅은 별로 없겠다는 거?(웃음) 후회는 들지 않지만요.”

전기엽씨는 의협선거에서 불태웠던 열정을 접고 세계로 눈을 돌렸다. 세계보건기구(WHO) 보건의료디렉터직 등 몇몇 국제기구 관련 직무에 원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는 요즘 주경야독으로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오랜 유학생활로 영어는 막힘없이 구사할 수 있지만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능통해야 자격이 주어진다는 설명이다. 큰 꿈을 갖고 미련 없이 부딪혀보고 있지만, 겸허한 마음가짐은 의협선거 때나 매한가지다.

“올해까지 도전해보고 안 되면 내년에는 다시 전주에 내려가서 개원의로 일할 거예요. 개원의인 아내와 같이 환자 열심히 보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이들 뒷바라지 해야죠. 이번에도 후회는 없을 겁니다.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해볼 수 있었으니까요.”

주 수 호 前 대한의사협회 회장

여전했다. 퇴임 후 100여 일. 수은계 눈금이 겁 없이 치솟는 8월 초입에 만난 주수호 前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여유롭다 못해 달관(達觀)한 모습에 가까웠다. 한결 차분해진 언행은 예전 의쟁투 시절 강경파, 개혁주의자로 대변되던 그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9만 의사의 수장을 역임한 그에겐 오히려 연륜과 내공의 깊이가 느껴졌다. 재집권 도전 실패 후 일체의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주수호 전 회장을 데일리메디가 어렵게 만나봤다.

주수호 전 회장은 “의료계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관망하고 있다”며 퇴임 후 3개월 동안의 근황에 대한 질문에 답을 대신했다.

‘현직 회장’이라는 프리미엄을 갖고도 재집권에 실패한 것은 전적으로 회원들의 갈증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이라고 진단하는 주수호 전 회장.

때문에 그는 의협을 이끌었던 지난 23개월의 세월을 되돌아 보며 자기 자신에게 부족한 점과 과했던 점을 조목조목 따져 묻고 있는 중이다.

“취임 당시 회원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고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는 생각보다 컸다”

퇴임 후 자신의 심경에 대한 첫 술회다. 그는 당분간 결코 길지도 그렇다고 결코 짧지도 않았던 의협 회장 시절에 대한 회고를 계속할 생각이다.

“의료계 고민의 끈 한시도 놓지 않는다”

일각에서 회자되고 있는 개원설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이 없다”고 일축했다. 외과 개원가의 실정도 실정이려니와 임상보다는 의료계 발전을 더욱 고민하고 싶기 때문이다.

“외과 개원가의 현실은 처참하다 못해 참담하다. 이러한 상황은 향후 의료계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작금의 의료환경을 개선시킬 수 있는 일을 하는게 더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의협회장 시절 가장 아쉬운 점을 묻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회원들과의 소통 부재”라고 즉답했다. 그만큼 쌓인게 많아 보였다.

자의적인 문제와 타의적인 문제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회원과의 소통 부재’를 겪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집행부에 대한 불신까지 이어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특히 취임 초기 국회, 정부와의 미흡한 관계설정에 대한 오해가 불거졌을 때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전혀 사실과 다른 의혹들이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해당 의원들에게 누가 될까봐 해명할 수 없었다. 마음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現 의협 집행부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는 대목에서는 “아직 시작 단계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냐”며 말을 아끼면서도 “의료계가 발전할 수 있도록 회원들이 집행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만 직선제로 선출된 회장인 만큼 논란이 되고 있는 회장선거 직선제 문제에 대해서는 강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직역, 지역을 벗어난 객관적인 선거인단 확보가 전제된 간선제는 적극 찬성이다. 하지만 의료계 현실상 아직까지는 요원한 얘기인 만큼 현 직선제를 수정, 보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끝으로 주수호 전 회장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아직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않았지만 의사사회와 의료계 발전을 위한 고민의 끈을 놓지는 않고 있다”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11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은빈 · 박대진 기자 (webmaster@dailymedi.com)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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