禁男(금남) 구역 뛰어든 그 남자! 24시
2009.07.02 22:00 댓글쓰기
간호사(看護師)라는 용어 자체는 성별 구분이 없지만, 우리는 으레 간호사라고 하면 곱게 머리를 빗어 올린 스커트 차림의 여자 간호사를 떠올린다. 간호 업무는 특성상 여성에게 적합할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최근 이러한 고정관념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올해 실시된 제49회 간호사 시험 합격자 1만1717명 중 남자는 617명으로 합격 비율이 5%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팅게일’ 이미지가 지배하던 간호학계에 조금씩 ‘남풍’ 현상이 불고 있는 것이다. 고되기로 소문난 3교대 근무에,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중환자실에서 청일점으로 근무 중인 고대 안암병원 이재용 간호사(28)의 하루 일과를 데일리메디가 밀착 취재해 1인칭으로 재구성해봤다.

06:00 -> 자다 깨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어스름한 새벽 빛이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덤덤히 병원으로 향하는 길, 거리에는 오늘을 시작하는 사람들과 남은 취기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교차하고 있다. 병원 4층 중환자실. 나의 하루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07:00 -> 물품인계를 받은 후 내가 맡을 환자를 인계받는다. 매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지만 하루 중 가장 떨리는 시간을 꼽으라면 이때가 아닐까 싶다. “이 분은 6인실로 옮기길 원하고 계시니까 보호자 확인 후 이동 진행해 주시고요, 나흘 전부터 배변을 제대로 못하고 계시니까…” 머릿속은 아직 잠이 떨 깼는지 Night번 간호사의 말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하나 기억해내기 위해 꼼꼼히 메모해 둔다. 이제부터 8시간 동안 이 환자들의 책임자는 나다. 내 손으로 한 첫 vital sign이 끝났다.

09:00 -> 주사약, 수액, 먹는 약을 부지런히 챙긴다. 시시각각 변하는 환자 상태를 세심히 관찰하려면 최대한 정확하고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00번 베드 환자분은 이틀 전 의식을 회복하신 때부터 “총각 간호사가 있으니 힘도 있고 시원시원한게 좋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하신다. 옅은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11:30 -> 보호자 면회시간이 다가온다. 오늘은 몇 시쯤 점심을 먹게 될까. 식당 메뉴는 뭐지? 다음 오프때는 뭘 할까. 잠시라도 달콤한 상상에 젖어 평온을 되찾는 시간이다. 동료 간호사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어제 본 연속극 얘기 같은 것을 스스럼없이 꺼내기는 좀 그렇다.

13:20 -> 비상이다. 0번 베드 000씨의 상태가 엉망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100회 이상이었던 HR(Heart rate)가 늘어지면서 40회 이하로 떨어지고, BP 35/15 Spo2 45%가 체크된다.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침착하자.’ 어느새 내 손은 Emergency car에 Epinephrine, Atropine 1A 준비를 하면서 인턴과 주치의를 다급히 부르고 있다. 간호사 선배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조용하던 ICU에 큰소리가 울려 퍼진다. “000 주세요.”, “000 해주세요,” “00 준비해 주세요.” 주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내 손 또한 더욱 바쁘게 움직인다. 그렇게 30분간 이뤄진 CPR. 결과는 안타깝게도 Expire…. 몸이 축 쳐진다. 마음이 무겁다.

15:00 -> 사망환자 처리를 하다 보니 Evening 근무자가 출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오늘도 인계시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환자 상태를 세심히 전달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래도 여자 간호사에 비해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점차 나아지겠지만.

16:00 ->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며 4명의 환자 인계를 무사히 마쳤다. 이제 막 인계를 받은 Evening 근무자의 표정은 어둡다. 불현듯 지칠 대로 지친 내 몸보다 인계 받은 간호사가 더 걱정된다. 여자 간호사들이 들기 힘들어하는 무거운 물품을 정신없이 채워 넣고 나니 늘 그렇듯 퇴근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17:00 -> 중환자실 구석에서 혼자 옷 갈아입을 곳을 찾는다. 탈의실이 따로 있는 여느 여자 간호사와의 차이를 가장 극명히 느끼는 순간이다. 커튼 뒤에 서서 재빨리 갈아입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동료의 목소리에 "네?"하며 무심코 얼굴을 내밀고 말았다. 1인용 탈의실을 급조할 수는 없는 걸까?

19:30 -> 모처럼 잡은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식사 후 들른 맥주집에서 여자친구의 친구 두 명과 동석했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는 말에 그녀들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번뜩인다. “어머, 그럼 우리 같은 여자 환자 엉덩이에 주사도 놔주나요?”, “항상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을 텐데 인기 많으시겠어요.” 직업을 밝힐 때 어김없이 돌아오는 질문들. 늘 그렇듯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21:00 -> 집에 들어오니 온종일 쌓인 피로가 엄습해온다. 데이트라고 해봤자 근처에서 식사 한 끼를 같이하는 정도가 전부다. 불규칙한 3교대 근무 특성상 친구들과 마음 놓고 술 한 잔 기울이는 약속을 잡는 일 같은 것은 사치가 될 수밖에 없다. 월요일부터 Night 근무로 일주일을 시작할 다음 주를 생각하면 이 순간은 천국이다. 푹 빠지지도 못하는 잠을 애써 청한다. 내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향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인터뷰-‘나이팅가이’ 이재용 간호사 5문 5답

Q1. 간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계기는?
아버지께서 교직에 몸담고 있으시다보니 자연스레 안정적이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찾게 됐다. 남자는 간호면허가 있어도 막상 대학을 졸업하면 다른 일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임상이 좋아서 오래 일할 생각이다. ‘적성에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해 보니 맞는 것 같다. 힘들어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맞춰나가려 노력한다.

Q2. 간호사로 일하면서 남자로서 힘든 점은?
간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힘들다. 누군가를 만나도 항상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종일 서서 일해야 한다는 점도 괴롭다. 여기에 남자 간호사에게는 힘쓰는 일, 무섭거나 위험한 환자로부터 동료 간호사들을 지켜줘야 하는 일 등이 추가된다. 병동에 잠시 근무할 때 젊은 여자환자의 경우 엉덩이 주사를 놓으려고 하면 거부 반응을 보여 난감한 적도 있었다. 똑같은 간호사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직 현실에서의 인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혼자 청일점이다 보니 더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도 있다.

Q3. 여자들 사이에서의 적응 노하우
간호대학에 처음 진학했을 때 여자 170명에 남자는 나를 포함해 4명뿐이라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꼼꼼하고 성실한 여자들 분위기 속에서 혼자 놀면서 방황하기도 했고.(웃음) 그런데 사회생활은 다 똑같은 것 같다.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사랑받는다. 성별에 상관없이 이런 개념을 인식하고 빠릿빠릿하게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Q4. 근무하면서 겪은 난감한 사건이 있다면?
중환자실에서 나이트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이쪽에서 흔히 쓰는 시쳇말로 ‘떡 먹으면 떡 친다’는 말이 있다. ‘떡 친다’는 것은 정신없이 바쁜 상황을 일컫는 것이다. 허기가 져서 떡 3개를 먹고 근무에 들어갔는데 내가 담당하는 환자 4명 중 3명의 상태가 갑작스레 악화되는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초 응급상황은 아니라서 주치의를 부를 수도 없고, 허둥지둥하는 동안 어느새 아침 해가 뜨고 있는데 눈앞이 정말 캄캄했다. 환자 파악도 못하고 있는데 Day근무 간호사가 출근하시는 바람에 인계 시간 내내 동문서답했다. 넋이 나간 내 상태를 보고 빨리 들어가라고만 하시는데 차마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

Q5. 간호업무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면허를 보유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전문직이다 보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일단 뿌듯하다. 방송 시트콤 같은 데서는 남자 간호사를 어리바리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희화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못된 편견이다. 간호사는 주사만 놓는다는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을 보면 누구나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결혼해서 자녀를 키우게 되면 자식이 아버지가 간호사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그런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10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댓글 0
답변 글쓰기
0 /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