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개량신약 '자충수의 덫' 되나
2009.03.01 21:54 댓글쓰기
[초점 上]바둑 격언 중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살아난 후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위험을 살피지 않고 무모하게 공세를 취하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보기 쉽다는 의미다. 작금에 전개되고 있는 국내 제약업계 행보와 당국의 특허정책은 이 격언에 잘 들어 맞는다. 상대적으로 복제약 의존도가 높은 국내 제약사들은 그동안 오리지널을 앞세운 다국적 제약사들과 특허권을 놓고 사투를 벌여왔다. 국내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특허권을 무너뜨려 거대 오리지널 시장에 진입하고자 했고 다국적사들은 국내사들의 '묻지마 복제'에 혀를 내두르며 '에버그리닝 전략'으로 응수했다. 여기에 최근에는 국내 특허심판원과 특허법원이 특허권에 대해 유한 태도를 보이면서 특허분쟁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 되고 있다. 하지만 국내사와 법원 모두 작금의 상황이 곧 자충수로 귀결점을 찍게 될 것임을 아직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그 숨은 틈의 허실을 데일리메디가 집중 조명해본다[편집자주]

'흥망(興亡)' 기로에 선 국내 제약계

국내 제약업계가 흥망의 커다란 변혁기를 맞고 있다. 한-미, 한-EU FTA의 의약 개방시대라는 큰 흐름에다가 글로벌 금융 위기라는 경제 한파까지 겹치면서 특허가 만료된 해외 신약들의 제네릭 의약품에 의존해서는 미래는 커녕 생존 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블록버스터 신약 특허를 주도해온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에 비하면 국내 제약업체들의 기술 수준은 아직 걸음마 수준.

국내 제약업체들은 제네릭을 앞다퉈 만들어 팔고 수익을 내는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분이 같은 제네릭 제품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이전 투구하는 현 시장은 과당 경쟁의 폐해마저 자주 눈에 띈다.

이들 업체에게 엄청난 규모의 자본과 기술력이 집약되고 오랜 임상 실험 기간을 거쳐야 비로소 탄생하는 오리지널 신약 개발은 '그림의 떡'처럼 아직까지 갈 길이 멀기만 한 이야기다.

실제 국내에서 지금까지 개발된 신약 수는 통틀어 14개에 불과하다.

새로운 희망 개량신약

그렇다고 의약 시장이 개방되면 국내 업체들은 그대로 고사하고 말아야 하는 운명일까?

최근 정부가 개량신약 우대 법안을 마련해 약가 조정과 R&D 투자, 빠른 특허 등록 등의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국내 제약업계는 이른바 '개량신약'이라는 새로운 희망에 눈을 돌리고 있다.

국내 업체들의 연구개발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LG생명과학, SK에너지, SK케미칼 등이 주로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동아제약, 한미약품, 유한양행 종근당 등의 업체들은 앞다퉈 새로운 성장동력인 개량 신약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개량신약은 신약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개발(R&D) 비용이 적게 들고 그 만큼 개발 기간도 짧기 때문에 글로벌 신약 이전 단계의 약을 의미한다.

개량신약은 국내 판매뿐 아니라 해외 수출까지도 가능해 국내 제약업체들의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되고 있다.

플라빅스의 교훈

하지만 개량신약에 대한 법적인 토대는 아직까지도 부족한 구석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국내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노피-아벤티스의 혈전 질환 치료제인 '플라빅스'의 특허 소송을 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동안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 캐나다, 호주 등 6개국에서 내려진 플라빅스 특허 유효성 판단이다.

가장 최근(2008년 12월)에 내려진 미국연방항소법원의 판결을 비롯, 해외에서는 예외없이 플라빅스 특허가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국내 특허심판원과 특허법원에서는 '라세미체' 화합물에 비해 약리 효과가 우수한 '우선성 이성질체'이면서, 동시에 제제학적으로 우수한 '황산수소염'이라는 점에서 이중으로 개선된 플라빅스(클로피도그렐 황산수소염)의 특허가 무효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라세미체'는 지금까지 한번도 상업화된 적이 없고, 플라빅스는 '라세미체'에서 개량 발명된 '이성체 의약품'이라는 맥락에서 플라빅스 소송은 개량신약의 특허성 논란과 직결돼 있다.

황산수소염의 특허성을 부정한 우리나라의 판결은 개량신약과 제네릭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국내 제약업체들간의 시장 경쟁 구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

즉, 플라빅스 개량신약의 잠재성을 보고 개발에 투자한 종근당, 한미약품은 이미 약 20 여개에 달하는 제네릭 제품들과 과당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위험

국내에서는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플라빅스 특허무효사건 이외에도 상당수 소송이 진행중이다.

최근 일부 사건에서 법원은 종결되었던 변론을 재개하는 한편, 특허법원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당사자들에게 특허 무효 여부에 관한 추가의 주장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국내 사건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개량신약에 대한 특허 인정이 까다롭고 어려울 경우 이는 비단 다국적 제약기업 뿐만 아니라 국내 제약업체들이 글로벌 신약 이전의 중간 단계인 개량신약을 새로 개발해도 특허 인정을 받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 만큼 국내 제약업체들의 해외 진출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개량신약은 국내 제약업계에게는 새로운 기회이자 의약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다. 그래서 개량신약에 대한 특허권 인정과 법적 토대의 마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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