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4]인턴, 낭만은 짧고 고난은 길게~
2008.04.16 21:50 댓글쓰기
쪽 시험에 시달리고 유급을 걱정하며 의대 6년 과정을 마쳤다. 낭만적인 대학시절을 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문득 심술이 난다. 입이 벌어지던 등록금 대출금도 차차 갚아나가야 한다. 하지만 고대하던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주위의 축하가 이어지고, 그동안의 고생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통해 의사로서의 첫 발도 내딛었다. 몸에 걸친 흰 가운이 유난히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인턴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턴 제도를 몸소 경험하고 있는 보통 인턴들의 생각을 요약 정리해 봤다. 앞서 취재에 응한 인턴들은 한사코 실명공개를 꺼려했다. 따라서 실명을 공개하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렇다면 인턴들에게 비쳐지는 인턴제도의 모습은 어떨까? 현재 몸담고 있는 병원의 급여와 복지환경, 수련 수준에 따라 의견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입을 모으는 말이 있다.[편집자주]

이 같은 부정적인 시각을 초래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큰 원인은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얻을 수 없는 수련 시스템에 기인한다. 인턴들은 보통 채혈과 드레싱 등의 업무에 투입된다. 간호사와 의료기사들도 가능한 업무 영역들이다. 일부 병원은 운영비 절감 차원에서 인턴들을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국내 굴지의 B병원 인턴대표 김모씨는 "인턴 수련 기간이 한 달 정도 됐을 때 불필요한 작업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고, 이 환경이 1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며 "채혈, 드레싱 등의 단순반복 업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다 보니 불만이 커져갔다"고 말했다.

그는 "응급실 등 일부 분야에서는 의사로서의 임상경험을 얻을 수 있어 좋았지만, 그 기간이 짧아 많이 아쉬웠다"며 "여러 파트를 돌며 의사로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 사례가 적었다"고 덧붙였다.

하루 종일 병실을 돌다보면 몸도 지치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남성 인턴들이 특히 그렇다. 최근 몇 년간 의대의 인기가 치솟고 의학전문대학이 잇따라 도입되면서 의학도들의 평균연령이 크게 높아졌다. 재수, 삼수를 거쳐 입학하게 되면 '1년이라도 아꼈으면' 하는 생각에 불만이 많아진다. 무엇보다 군 입대 문제가 걱정거리다. 30세 가까운 나이에 군에 입대하려고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군의관을 가야할지, 공보의를 택할지 여간 고민스러운 게 아니다. 이럴 땐 인턴제도가 더욱 싫어진다.

C의료원 인턴 박모씨는 "이미 100일 당직 개념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수련 환경이 개선됐다. 그러나 의학전문대학원 도입으로 의학도들의 연령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수련과정을 떠나 인턴 제도를 근본적으로 피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의대 교육과정이 6년제에서 8년제로 옮겨가고 있는 만큼 서브인턴제도 등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인턴 제도 폐지를 검토해 볼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여성 인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예전 선배들이 26살 전후로 수련과정을 겪었던 것에 반해 점차 연령이 올라가는 추세다. 결혼과 출산이 겹치기라도 하면 고민이 많아진다. 사실상 인턴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E병원 인턴(여성) 이모씨는 "의학전문대학원 도입으로 여성 인턴들의 연령도 높아지는 추세이며, 이는 제도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난다"며 "여성으로서 특혜를 바라는 것은 아니나 환경 변화에 따른 효과적인 대응책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도저도 아닌 ‘기름 같은 존재’

병원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지만, 진정한 식구가 아니라는 박탈감이 인턴들을 힘들게 한다. 수련병원의 전공의 정원이 100명이라면 인턴은 대략 150여명 내외가 선발된다. 원하지 않아도 50여명은 병원을 떠나야 한다. 심리적 박탈감이 생긴다. 1년 간 수련과정을 겪으며 애정을 쏟았던 병원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형식적으로 수련과정에 응하는 인턴들이 많아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에 육체적, 환경적 불만이 많아지면 집단 파업사태도 벌어진다.

지난해 울산의 모 병원에서 인턴들이 집단으로 수련과정을 거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주일이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턴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화제가 됐다.

B병원 인턴대표 김모씨는 "전공의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수련생활을 하는 인턴들이 많다"며 "일부 진료과는 정말 하는 일 없이 참관하는 형태로 수련과정이 이뤄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면 응급실, CPR 등 임상경험을 두루 할 수 있는 파트를 강화해야 한다"며 "적어도 수련과정을 겪으면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전공의 선발이 끝나는 11월을 전후로 인턴들의 근무태만이 나타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전공의 선발이 끝난 만큼 긴장감이 풀리고 불만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

B병원의 또다른 인턴 최모씨는 "힘들어도 원하는 진료과에서 전공의 과정을 밟기 위해 수련과정을 이어나가고 있다"며 "평가가 이뤄지는 초반에 열심히 해 전공의 시험에 합격하자는 생각으로 인턴 수련을 견뎌왔다"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인턴들에게 최고의 인기과는 예상대로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였다. 산부인과, 흉부외과의 기피현상은 여전했다.

찬성 입장도 있어…착취 대상 아닌 가족으로

물론 인턴 제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 양·한방 진료를 동시에 수행하는 K병원 인턴은 인턴 제도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의사로서의 응급대처 능력을 키울 수 있고, 여러과를 돌며 다양한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같은 분위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른다. 수련의 간 사이가 돈독하고, 인턴을 우대하는 병원 분위기가 뒤따라야 한다.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신뢰감은 언제곤 불신으로 되돌아 온다.

K병원 인턴 구모씨는 "동료들과 숙식을 하면서 많은 정을 나눴고, 응급실 경험을 통해 임상의사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며 "힘들어도 매달 배우는 게 다르고, 임상 노하우를 체득할 수 있어서 인턴 제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어느 병원이든지 불필요한 단순 업무가 많아 문제가 되는 것 같다"며 "인턴 수련시스템을 좀 더 효율적으로 개선하면 불만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제안했다.

인턴 제도를 한 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질문에는 "의사가 되기 위한 중간과정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수련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E병원 인턴 이모씨도 "인턴을 너무 무시하거나 저임금 노동자로 보는 시각을 개선해야 인턴 제도가 올바르게 운영될 수 있다"며 "의사로서의 자부심, 수련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선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처럼 인턴들의 불만이 높지만, 인턴 제도가 빠른 시일 내 사라질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점진적으로 문제를 개선하고, 내부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 해답일 수 있다.

취재에 응했던 인턴들은 "인턴 제도가 지금 당장 사라질 수 없다면, 수련의 질을 높이"라고 입을 모은다. 인턴 수련만 거쳐도 임상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인턴들 사이에서는 국내 대표적인 S대학병원이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S병원처럼만 하면 인턴 제도에 불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인턴들도 종종 만났다. 젊음으로 육체적인 피로는 극복할 수 있으나, 빈약한 수련 시스템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자 바람이다.

S대학병원은 올해 초 '전공의 근무지침'을 마련하는 등 지속적으로 수련시스템을 개선해 왔다. 이 지침에는 근무시관과 당직, 출산휴가 등 그동안 문제가 됐던 사항들을 자세히 규정해 놓았다.

인턴 수련시스템 또한 단순 업무를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 인턴들은 제 2 병원으로 파견을 가거나 흉부외과 등에서는 비교적 주치의 역할을 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병원측도 단순 업무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 중이다.

S대학병원 인턴 성모씨는 "인턴제도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견 병원이나 흉부외과 등에서는 비교적 주치의 역할을 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며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단순 업무를 줄인다면 인턴들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턴 제도를 바라보는 인턴들이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대책 없이 당사자들 불만이 높아만 가면 인턴 제도의 올바른 운영은 요원하다.

취재에 응했던 인턴들은 "여타 직종에 비해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인턴들이 1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수련병원과 정책 운영자들의 각별한 관심이 요구된다"며 "폐지가 힘들다면, 저임금 노동자가 아닌 병원의 한 일원으로 수련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 내용은 오프라인 데일리메디 5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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