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내몰리는 의사들 '비상구 없나'
2006.11.05 21:58 댓글쓰기
저는 개원을 해서 두 번 망한 의사입니다.

‘피 터지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서울을 피해 이미 3차례나 전주, 울산 등 지방 중소도시를 전전했습니다. 그럼에도 싸늘하게 식은 경기 탓인지 매달 발생하는 적자 행진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서울로 상경하기 위한 채비에 여념이 없었던 저에게 며칠 전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경영난 타개를 목표로 삼고 서울에서 함께 내려와 인근에 개원을 했던 산부인과 동료가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제 동료는 부산 중구에 지난 1991년 개원하고 10여년을 훌쩍 넘겼지만 2~3년 전부터 그에게 남은 것은 5억원이 훨씬 넘는 빚과 계약 정지된 신용카드 뿐 이었습니다.

저출산의 칼바람은 산부인과를 매섭게 몰아쳤고 비현실적인 건보수가 등으로 인해 그가 오랫동안 극심한 경영난을 겪어왔음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3개월 전 성형외과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곳 사정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지방에서도 성형외과는 이미 넘쳐나고 있었으며 줄줄이 들어서 있는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서울 토박이였던 동료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눌러 앉겠다’고 결심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했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저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깨 너머 배운 기술로 수술을 감행했던 탓인지 의료사고까지 터지면서 그를 짓누르는 압박감은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 심리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상처도 깊어지고 있었음을 지금에서야 회고합니다.

그가 목숨을 끊기 약 한달 전 무렵, 우울증 증세가 보여 내심 염려가 됐었지만 공원에서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워낙 밥그릇 싸움이 심해 혼자서 적자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요즘은 환자가 해달라는 대로 해줘. 죽지 않는다면 말이야…”라고 말끝을 흐렸던 그의 표정이 문득 떠오릅니다.

밥그릇 싸움 넘어 전쟁직전의 의료계

지난달 28일 부산에서는 병원간 과당 경쟁에 따른 극심한 영업 부진과 의료사고에 따른 심리적 중압감으로 괴로워하던 성형외과 원장 김모(46)씨가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인은 지난 1991년 부산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저출산의 여파로 극심한 경영 악화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김씨는 성형외과로 업종을 변경, 지난해 4월 다시 병원 문을 열었으나 인근 병원들과의 경쟁에 밀려 영업 부진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입지를 굳히고 있던 동종 병원 간 과열 경쟁이 이를 더욱 부추겼던 것.

특히 김씨는 최근 의료 소송에 휘말리면서 합의 문제를 싸고 심리적 중압감으로 우울증 증세까지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현재 의료계를 짓누르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들이 한 의사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 동료 의사들은 작금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자살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잘 버는 놈 있고 못 버는 놈 있다지만…”

빚에 허덕이다 결국 폐업하는 산부인과에 좀처럼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고 있다. 과도한 빚에 쪼들리다 설상가상으로 우울증까지 겹쳐 자살하는 사례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올해만 해도 병원 경영난으로 목숨을 끊은 의사는 벌써 3건이다.

의사들의 잇단 자살을 둘러싸고 일선 개원가에는 안타까움에 혀를 차면서도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은 이미 공공연히 확산돼 있다.

산부인과 개원의들이 경영 악화를 이유로 진료과목을 변경해 성형외과나 피부과 등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의원 운영도 어렵다.

간호사 월급과 건물 임대료, 의료기기 대여료 등 이리저리 빼면 개업의에게 떨어지는 돈은 ‘푼돈’. 실제 한 개원의는 “간호사 월급보다 못한 돈을 가져간다”고 하소연한 경우도 있다.

조홍준 울산대 의대 교수는 “이같은 기현상은 정부가 중장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의료인력 수급정책을 세우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위기의 개원가, 돈 되면 뭐든 해야지!"

경영난에 빠진 개원 의사들의 진료과 영역파괴 현상 역시 이 의사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요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당초 산부인과 전문의였던 이 의사는 저출산에 따른 경영난이 심각해지자 고심 끝에 성형외과 영역의 진료 및 시술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비전공과의 시술이 익숙치 않았고 결국 의료사고를 내고 말았다. 의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괴로워했고 오랜 기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종국에는 죽음의 길을 택한 것.

개원가의 진료과 영역파괴는 얼마전 방영된 PD 수첩을 통해서도 그 실체를 드러냈다.

당시 PD수첩은 '의료계 영역파괴-원장님은 성형 공부 중'이란 제하의 방송을 통해 비전문의들의 성형시술 실태를 고발했다.

방송은 비전문의로부터 수술을 받은 후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의사들의 영역파괴의 맹점을 지적했다.

이들 환자를 시술한 의사는 모두 산부인과, 소아과, 가정의학과 전문의였으며 심지어는 의대 졸업 후 개원한 일반의사도 있었다.

경영난에 내몰린 의사들의 돈 되는 장사 다툼은 결국 의료의 질 저하를 초래할 것이란 지적이 숨진 의사에게는 현실로 나타났고 이는 곧 자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됐던 것이다.

의료사고에 우울증까지 '지친 의사들'

최근 성형외과로 간판을 바꿔단 산부인과 의사들의 의료사고 대한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자 의료계에서는 “한 번만 실수해도 패가망신한다”는 볼멘소리도 터져 나온다.

대한미용성형외과학회 양정열 이사장은 “다른 과목을 전공한 의사가 개설한 성형외과는 결국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로 수술을 감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사고를 만들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장기불황에 환자 감소, 저수가 정책 등으로 인해 병원 경영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막대한 손해 배상액은 그야말로 폐업으로 직결된다는 소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영 압박으로 의사들이 우울증과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의사들에 대한 소위 사회적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속사정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다.

서울 성북구 한 산부인과 개원의는 “의사가 돈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면서 “의사라는 직업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도 신경써야 하고 잘(?)나가는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원가에 턱없이 못미치는 저수가체계를 개선해 2007년도 수가 결정에 반드시 반영해야 하며, 의사를 억압하고 의료계를 고사시키는 각종 불합리한 규제정책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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