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의료계 안팎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2월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故 박선욱 씨의 죽음으로 알려진 ‘태움’. 태움이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간호사 간 괴롭힘을 나타내는 은어다.
박 씨의 죽음은 병원 내 갑질 문제를 공론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가 지난해 12월부터 금년 2월까지 진행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태움을 경험한 간호사는 10명 중 4명(40.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의료기관 근무 중 욕설이나 반말·무시·모욕적 언사 등을 경험한 비율은 56.2%로 직종별로는 간호사 65.5%, 간호조무사 48.5%, 사무행정 33.5%였고, 폭행을 당한 사례도 7.5%에 달했다.
보건노조 실태조사에는 전국 54개 병원에서 1만 1662명의 근로자가 참여했다.
4월에는 사회 각계에서 불었던 ‘미투’ 논란이 삼성서울병원을 덮쳤다. 인턴 여의사인 A씨는 “같은 병원 레지던트 의사 B씨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 했다”고 폭로했다. 해당 병원에서는 2월에도 선배 레지던트가 후배 인턴 여의사를 성폭행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비단 의료인 간의 불상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에는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신생아 4명이 집단으로 사망했고, 1월에는 밀양 세종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환자와 의사·간호사 등 38명이 숨지고 117명이 부상을 입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금년 3월에는 ‘유아인 경조증’ 발언을 했던 정신과 C의사가 환자와 성관계를 맺었고, 학회는 그를 제명했다. 학회 징계 사유로는 ‘환자로 만난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 ‘진료과정에서 알게 된 환자 개인정보 유출 등이었다. C의사는 8월 ‘위력에 의한 간음죄’로 검찰에 송치됐다.
5월에는 강남의 한 피부과에서 시술을 받은 환자 20명이 집단으로 패혈증 증상을 보였고, 경찰과 보건당국은 이의 원인으로 마취제인 ‘프로포폴’ 오염을 지목했다.
이렇듯 의료기관 내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잇따라 사건·사고가 일어나자 정부가 칼을 빼들었다. 바로 의료인 ‘면허정지’와 ‘의료인 징계 정보공개’ 등이다.
총리 주재 자리에서 나온 의료인 면허정지·징계정보 공개
지난 7월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서울청사에서 ‘2018년도 제 1차 소비자정책위원회’를 주재하고 ‘의료인 징계정보 공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의료인의 자율규제를 활성화하고, 성범죄 등 중대한 법 위반 사실 등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거쳐 정보공개를 추진하라고 복지부에 권고했다.
그동안 의료인 징계정보 공개가 없어 국민의 알권리와 선택권 등이 보장되지 않아 소비자 피해예방에 미흡했다는 것이다.
또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제 46회 국정현안 점검조정회의’에서는 인권침해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의료인의 면허를 정지하기로 했다. 정부는 올해 말까지 의료법 개정을 통해 직장 괴롭힘 등 인권침해로 형사처벌을 받은 의료인에 대해 면허정지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할 방침이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반발했다. 우선 공정위가 복지부에 권고한 의료인 징계정보 공개에 대해 의협은 성명서를 내고 “의료인에게만 이중적 잣대를 적용해 민감한 개인 정보를 공개하려는 개악에 절대 반대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대한개원의협의회에서도 ‘공정위는 당장 의사 개인 신상정보 공개요청을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통해 “의료인이 검진 의사 실명제, 명팔 패용 의무화 등 각종 신상 공개 정책에 의해 기본권을 훼손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의사단체 주장과는 달리 변호사·변리사 ·세무사 등 타 직종에서는 징계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이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성명·생년월일·등록 번호· 사무소 주소·징계 사유 등을 공개하고 있는데, 이런 조치는 모두 변호사법 시행령 제23조·세무사법 제22조·변리사법 시행령 제21조 등에 따른 것이다.
현재 의협은 9월부터 시작된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료인 징계정보 공개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형사처벌을 받은 의료인에 대한 면허정지 등 제재에 대해서도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 8월 17일 복지부는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을 개정· 시행해 비도적 진료행위에 대한 자격정지 처분기준을 세분화했다.
이의 내용은 ▲진료중 성범죄(자격정지 12개월) ▲처방전 없이 마약, 향정신의약품 투약·제공(3개월) ▲허가받지 않은 의약품 사용·변질·오염·손상됐거나 유효기간 또는 사용기간이 지난 의약품 사용(3개월) ▲형법 제270조 위반해 낙태한 경우(1개월) ▲그 밖의 비도덕적 진료행위(1개월) 등이다.
이중 낙태의 경우는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한 의료계의 강력한 반대 부딪혔고, 결국 복지부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올 때까지 처분을 미루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전문 직종 중 의료인 범죄와 이로 인한 검찰 송치 건수가 수위임을 감안하면, 의료계의 이 같은 주장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경찰청이 내놓은 ‘2017 경찰 범죄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검찰에 송치된 의사는 5873명으로 기타 전문직을 제외한 전문 직종 중 수위에 있었고, 변호사(557명)보다도 10배 이상 많았다.
물론 대한변호사협회(변협) 회원 수는 2만 여명이고 의협은 13만 여명이기 때문에 절대비교는 어렵지만, 양 기관의 총원이 10배 이상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이들의 죄목은 죄·폭력범죄·지능범죄·보건범죄·교통범죄·특별경제범죄 등이었는데 강력범죄로는 강제추행(100명)·강간(15명), 폭력범죄로는 폭행(255명)·상해(107명), 지능범죄로는 사기(667명)·문서 및 인장(106명), 보건범죄(1650명), 교통범죄(1001명), 특별경제범죄(143명), 기타 1357명 등이었다.
의료법 개정 필수···‘공’은 국회로
이렇듯 의료계의 반발을 사고 있는 의료인 면허정지와 징계정보 공개는 모두 ‘의료법’ 개정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
우선 면허취소·정지 등 행정처분이 법적인 부분인 것과는 달리 징계는 의협 내부에서 할 일이지만, 징계정보를 공개하는 것 또한 법적근거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변호사법 시행령 23조는 징계처분을 받은 변호사의 성명·생년월일·소속지방변호사회 및 사무실의 주소·명칭, 징계처분의 내용 및 징계사유의 요지, 징계처분의 효력 발생일 등과 함께 징계정보 공개기간·공개방법 등에 대해서도 규정 하고 있다.
의료인 징계정보 공개에 대한 논의가 미진한 만큼 시간이 다소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 관계자는 “법적 처벌만 공개하고 행정처분은 공개 안할 것인지, 정보공개를 어디서부터 무엇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국무조정실에서 정보공개 시기를 특정하지 않은 만큼 급하게 진행될 사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국회의 움직임도 없다. 지난해 10월 자유한국당 송석준 의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의사의 징계·사고 이력 등을 공개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주문했으나, 최근 송 의원이 국토교통위로 상임위원회를 옮기면서 흐지부지 되는 분위기다.
이와는 반대로 국회의 의료인 면허취소·정지 등에 대한 입법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윤후덕 의원은 올해 8월 29일 의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여기에는 의료행위 중 성폭력범죄를 저지르거나 업무상과실로 사람을 사상에 이르게 해 형을 선고받은 경우를 의료인 면허의 취소 또는 자격정지 사유 등으로 포함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면허가 취소된 의료인에 대한 면허 재교부 제한기간을 연장하는 내용도 함께 포함됐다. 같은 당 유은혜 의원은 올해 2월 대표 발의한 의료법 개정안 에서 교수와 전공의 사이 뿐만 아니라 의료인 간 폭력과 폭언, 성희롱·성폭력 등으로 금고형을 받으면 의사면허를 정지하는 법안을 내놨다.
국무총리와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의료인 징계정보 공개와 면허취소·정지 등 사안이 국회 문턱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가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