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한해진기자. 기획 2]의료계가 각성의 목소리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달아 터지는 대리수술 사건으로 인해 여론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최근 파주 한 정형외과 병원서 대리수술을 받은 환자 2명이 잇따라 숨졌고 앞서 부산의 한 정형외과의원에서도 의료기기 업체 직원이 수술에 참여해 환자가 뇌사 상태에 빠진 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정형외과 원장은 학회에서 제명됐고 대한의사협회는 고발에 나섰다.
잊을 만 하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대리수술 파장의 후유증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의료기기업계, 가해자 or 피해자
최근 의료기기 영업사원들이 관행적으로 대리수술을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커지자 업계에서도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다.
회사 내부에서 새로운 영업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는 있지만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영업사원 개인을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이다.
대리수술 이슈와 관련해서 국내 A의료기기업체 관계자는 “수술방 출입 및 불법행위에 대한 감시가 엄격해질 것으로 예상돼 법률 상담을 통해 병원에서 영업 시 기구 시연이나 제품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가이드라인을 재정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의사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거래처를 하나 잃게 되는 것이 영업부의 고충”이라며 “글로벌 기업들은 회사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불법행위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유사한 대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존 가이드라인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2018년도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국립중앙 의료원의 경우 2016년 5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약 30개월 동안 외부인 약 940명이 수술실에 출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에 한명 꼴로 외부인이 수술실에 드나든 것이다.
이 중 45차례는 ‘시술’, ‘수술’, ‘수술 참여’, ‘OP’ 등으로 기록돼 있으며 국내외 의료기기업체들의 사명이 다수 적혀 있었다. 외부인이 수술에 참여했다고 의심 가능한 정황이다.
누구 하나 인정하지 않지만 실체는 분명 있는 셈이다.
글로벌 B의료기기업체 측은 “장비 사용 설명은 가능하지만 환자에게 직접 수술을 지시받을 때에는 거부하고, 의사가 문제를 제기하면 거래하지 않는다는 규정은 있다”면서도 “현실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따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측은 “해외 의료기관 및 업체들이 수술방 출입과 대리수술 금지 규정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 사례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협회에 따르면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경우 의료기기업체 직원의 수술실 출입이 일반적이며 직접적인 환자접촉과 의료행위는 금지하고 있다.
다만 의료기기업체 직원이 수술실 출입 시 준수해야 할 사항을 자율규약 및 가이드라인을 통해 명시, 요구한다.
“제품 관리하려면 수술실 출입 불가피”
유럽의료기기연합회(Eucomed)는 의료법 등 법령의 준수, 의료기관 승인, 환자에 대한 고지, 수술실에서의 행동지침, 제한적 역할 등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또한 미국의사협회(AMA)는 업체 직원의 수술실 참관을 허용하되 환자 동의를 받아야 하며, 미국외과의사협회 (ACS) 에서 규정한 ‘의료기사·직원 준수사항’에 따라 멸균 현장에 진입하거나 환자를 접촉하는 행위 금지, 수술 또는 의사 결정에 관여할 수 없게끔 하고 있다.
미국수술간호사협회(AORN)는 수술팀이 의료기기와 관련된 필수 교육, 기술 훈련 및 지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상담 프로그램 또는 1대1 교육을 제공하고, 의사의 감독 하에 의료기기를 다룰 경우 전문교육 이수와 의료기관의 승인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도록 규정한다.
즉, 수술실 출입 자체가 불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수술실 안에 들어가는 장비를 취급하는 기업의 경우 제품 확인을 위해서라도 출입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한 정형외과 임플란트업체 관계자는 “새로운 장비가 나올 때마다 사용법을 안내한다. 수술을 집도하는 전문의뿐만 아니라 장비를 이해하고 수술 방식에 적응해야 하는 의료진들 에게도 몇 달에 걸친 교육이 꾸준히 진행된다”며 “이 과정에서 수술실 출입을 일일이 보고하거나 확인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용법을 안내하되 구체적인 환자 케이스에는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내려간다. 우리 장비의 경우는 의사가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큰 우려는 없지만 회사까지 보고되지 않는 경우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계를 인정했다.
“병원이 먼저 바뀌어야”
오히려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개별 직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또 다른 글로벌 C업체 관계자는 “대리수술 관련 가이드라인 강화를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영업사원이 의사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오히려 회사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고 직원 개인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되는 모순이 생긴다”며 내부 조율이 쉽지 않음을 밝혔다.
회사에서 대리수술 금지 규정을 만든다 해도 제품을 구입하는 병원에서 의료행위를 강요하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영업사원이 많지 않을 거라는 설명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불법 의료행위를 한 직원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해당 관계자는 “학회 때 부스 하나 덜 빌리기만 해도 난리가 나는 게 영업 파트다. 고객인 병원과 의사 눈치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업체들도 직원 보호를 위해 재교육을 진행 중이지만 근절을 위해서는 문화 자체가 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결국 병원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D업체 관계자는 “수술방 내에 장비가 있어 채워 넣어야 하거나 새로운 제품 설명을 할 때와 같이 수술방 출입이 불가피한 상황도 존재한다”며 “병원에서 먼저 수술방 출입 규정 정비와 무자격자 의료행위 관리감독 분위기가 형성되면 대리수술 관행도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료기기협회 관계자도 “해외 사례를 보면 수술실에 드나드는 것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 안에서 의료행위가 이뤄지는지 여부를 철저하게 검증한다는 입장인 것”이라며 “제대로 된 규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이어 “영업사원 개인 입장에서 죄책감과 범법에 대한 두려움을 떠안고도 의료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며 “사후 처벌도 엄격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영업사원이 불법 의료행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당 관계자는 “소모품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어 업체의 입장에서는 의사와 병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며 “의료기관의 매뉴얼이 엄격해진다면 업체에서 먼저 따르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송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