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현장에서 의사가 없어 타 진료과 의사가 대리처방하고, 병원이 의사 인력 이탈을 막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개인 차량과 운전기사까지 붙여주고 있다는 폭로가 나왔다.
17일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원들이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에 반대해 서울 광화문에서 총궐기대회를 벌인 가운데, 같은 날 의사를 제외한 보건의료직역 중심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이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맞불을 놨다.
보건의료노조는 "의료현장은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한 진료 정상화를 원하고 있다"며 의사 부족으로 인한 진료 차질과 병원이 의사를 '붙잡아두려는' 고육지책 사례를 공개했다.
노조는 산하 101개 지부, 113개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12월 6일부터 14일까지 진행한 의사 부족 실태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실태조사에는 ▲서울성모병원, 고대의료원, 한양대의료원 등 31개 사립대병원 ▲전남대병원, 전북대병원, 충남대병원 등 5개 국립대병원 ▲수원병원, 부산의료원 등 24개 지방의료원 ▲양산병원, 대남병원 등 5개 정신·재활의료기관 ▲예수병원, 동강병원 등 15개 민간중소병원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암센터, 원자력의학원, 중앙보훈병원 등 20개 특수목적공공병원 ▲적십자혈액원 등이 참가했다.
서울아산·충남대·이대·경상국립대, PA 200명 이상···병동 축소·회진 불가 속출
조사 결과, '의사 인력이 충분하다'고 응답한 곳은 전체 조사대상 101개 중 11곳이었고, 나머지 89곳은 '부족하다'는 답을 내놨다. '야간과 주말 당직의가 충분하다'고 응답한 곳도 4곳에 그쳤다.
의사 인력 이탈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년이 아니지만 개원해 나간 의사가 있다'고 답한 곳은 81곳이었고, '연봉이 적어 그만둔 의사가 있다'고 응답한 곳도 85곳으로 집계됐다.
그 결과 진료지원인력(PA)도 100명 이상인 곳이 다수였다. ▲서울아산병원 387명 ▲충남대병원 284명 ▲이화의료원 249명 ▲경상국립대병원 235명 ▲아주대병원 137명 ▲영남대병원 125명 ▲전북대병원 114명 ▲원주연세의료원 111명 ▲부산백병원·해운대백병원 109명 ▲예수병원 105명 등으로 나타났다.
중소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광주기독병원(60명), 성남시의료원(50명), 동강병원(45명), 부산의료원(32명), 대전선병원(32명) 순으로 PA인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의사 부족은 진료 차질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진료과를 폐쇄해 운영되지 않고 있는 곳이 있다'고 응답한 곳은 101곳 중 49곳으로 절반에 육박했다. '병동을 축소하거나 통합해 운영한 경우가 있다'는 응답도 41곳에서 나왔다.
이밖에도 '해당과 당직의가 없어서 진료공백이 발생한 적이 있다' 76곳, '의사가 회진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아예 회진을 안 하는 경우가 있다' 58곳 등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한 의료기관에서는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없어 과를 폐쇄했다가 정년퇴직한 고령 의사를 채용했지만, "하루 3명의 영유아만 진료하겠다"는 방침으로 보호자 민원이 폭주해 이 의사도 그만뒀다는 증언이다.
또 다른 의료기관에서는 신경과 의사가 퇴직한 후 의사를 못 구해 다른 진료과 의사가 대리 처방을 해주고 있다는 폭로도 있었다.
의사 구인난으로 '모시기' 고육지책 만연
조사대상 101곳 중 91곳이 '의사 수급난을 겪고 있다'고 답할 정도로 의료기관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92곳은 의사를 채용하기 위해 연봉을 인상해 제시하기도 했다. 고령 의사, 문제를 일으켜 퇴사한 의사 등 불가피한 채용 사례도 78곳에서 나타났다.
A 의료기관 관계자는 "의사 인력이 없지만 병원이 의사들의 연봉을 올려주지 못해 의사 출퇴근 편의를 위해 별도의 차량과 운전기사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B 의료기관 관계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집단 사직해 다른 진료과장들이 매일 돌아가며 당직을 서고, 병원은 이들 인건비로 매일 1인당 100만원을 수당으로 지급 중이다"며 "의사 인건비를 못 맞추니 의사들이 4~4.5일 근무하는데 휴진이 많다고 민원이 폭주한다"고 토로했다.
의사 채용이 어려운 현실을 모두가 알고 있어 내부 구성원 간 분위기도 악화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C 의료기관 관계자는 "해당 과 의사를 뽑기 힘들다는 이유로 폭행 가해자인 의사가 진료하고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 한다"며 "민원이나 갑질이 발생해도 동료들이 참고 견디고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
"국민 85%, 의료계 집단진료거부 반대···국민 이기는 의사 없다"
보건의료노조는 이 같은 실태조사에 더해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내세우며 의료계에 "집단 진료거부를 멈추라"고 주문했다.
노조가 지난 11월 성인 10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 71.9%가 "대한의사협회(의협)의 의대 정원 확대 반대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85.6%가 "의협의 집단진료거부를 반대한다"고 말했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의사가 부족하지 않고 저수가를 끌어올리는 게 우선이라는 의협 주장은 의료현장 현실을 외면한 억지 주장이고, 의대 정원 확대 발목을 잡기 위한 궤변"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지금은 붕괴 위기로 치닫는 필수의료·공공의료·지역의료 살리기를 위해 전국민적 집단지성을 모아야 할 때"라며 "국민을 이기는 정부 없듯 국민을 이기는 의사도 없다. 국민의 절박한 호소에 찬물을 끼얹는 몽니 부리기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