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의사들 피로감도 가중되고 있다. ‘언젠가 해결 되겠지’라던 위안이 이제는 체념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특히 대학병원 교수들 사이에서는 ‘사태가 해결돼도 예전으로의 100% 회귀는 불가능하다. 이제부터라도 뉴노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서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당직은 이미 일상이 된지 오래고, 오랜세월 전공의들 몫이었던 여러 업무까지 챙겨야 하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수용하고 적응해 가는 모습이다. 그렇게 대학병원 교수들의 뉴노멀 적응기는 진료현장에서 점점 확산되고 있다. [편집자주]
어느덧 10개월이 훌쩍 넘었다. 부당한 정책에 저항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각오로 임했지만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야간 당직 후 오전 외래를 보는 일상이 이제 더 이상 낮설지 않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무색할 정도다.
실제 의정 사태 초반인 지난 4월 한 대학병원 교수협의회는 교수들이 집단 번아웃을 호소하고 있다는 설문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10명 중 8명의 교수들이 전공의 사직 이후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겨움을 호소했고, 한계에 도달하는 기간이 ‘4주 이내’라는 답변이 62%를 넘겼다.
밤에는 당직 근무, 낮에는 외래 진료를 보며 ‘쪽잠 사투’ 속 환자를 마주하는 남은 의료진의 번아웃으로 병원 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급기야 빅5 병원은 교수들의 번아웃을 우려해 일주일에 한 번 외래진료 및 수술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의대 증원 정책으로 촉발된 전공의 사직이 장기화 되면서 현장에 남은 교수들의 피로도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 개월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대학병원 진료는 계속되고 있다. 물론 예년 수준의 궤도는 아니지만 사태 초반 우려했던 극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대부분 교수들이 달라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정부가 비상진료체계 유지 일환으로 실시한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진료현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경험해 보지 않았던 상황에 적잖이 당혹스러웠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전공의 복귀를 쉽사리 입에 담는 사람은 없다”며 “이제 전공의 없는 병원 시스템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전공의 의존 행태 탈피…제도가 지향하는 뉴노멀
정부가 의료개혁 일환으로 야심차게 추진한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지원사업도 일선 진료현장의 뉴노멀 대응에 기폭제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연간 3조원, 3년 간 총 10조원이 투입되는 역대급 제도에 전체 47개 상급종합병원이 참여했다.
중환자실 입원료를 포함한 보상에 1조5000억원, 중증수술 보상에 5000억원, 사후보상에 1조원 등 연간 3조원을 투자한다는 소식에 병원들이 경쟁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지원사업에 참여한 42개 상급종합병원은 중환자실, 소아·고위험 분만·응급 등 유지·강화가 필요한 병상을 제외한 총 3186개 일반병상을 감축했다.
무엇보다 이번 지원사업의 핵심인 전문의 중심병원으로의 전환에 각 병원들 모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의사 인력의 40%를 차지하던 상급종합병원의 전공의 비중을 20%로 줄여, 전문의와 간호사를 비롯한 전문인력을 중심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당 80시간에서 60시간으로, 연속근무 시간을 36시간에서 24시간으로 축소키로 했다.
진료 영역에서 전공의 의존도를 파격적으로 줄임으로써 수련의 밀도를 높이는 한편 현재 있는 인력의 숙련도를 높여 전문의와 PA 간호사를 팀 구조로 전환한다는 구상이다.
또 다른 대학병원 교수는 “전공의에게 기대지 않는 진료현장이 바로 뉴노멀”이라며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가야만 하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도의 성급함이 없지 않지만 취지에는 십분 공감한다”며 “병원들도 뉴노멀에 대비해 속도감 있는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한정된 의료인력 상황에서 상급종합병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문의 확보에 나서면서 발생하는 여러 부작용에 대해서는 우려도 적잖다.
정부는 대학병원의 전공의 의존도를 낮춰 ‘전문의 중심 병원’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지만 이러한 정책이 오히려 전문의 기근현상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 지방 국립대병원 사직 교수 상당수는 서울이나 수도권 대학병원 또는 인천, 부산 등 대도시 대학병원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 지방 대학병원 원장은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살리자는 취지로 추진된 의대 증원 정책이 역설적으로 지방 대학병원과 지역 필수의료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고 토로했다.
진료에 밀린 연구, 후퇴하는 한국의료
정부가 지향하는 의료개혁과 뉴노멀이 지나치게 진료에만 치중돼 있어 대학병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연구와 교육 기능 쇠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 의정 사태 이후 의학계 학술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대한의학회가 발행하는 영문학술지(JKMS)에 올해 1~8월 최종 게재된 논문은 305편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08편 보다 25.2% 감소했다.
매주 6~7편의 논문이 실리던 대한의학회 학술지 홈페이지는 3편 정도로 뚝 떨어졌다.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교수들의 진료 업무가 늘면서 자연스레 연구 감소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그동안 의대교수들은 외래 진료나 수술이 없는 날 연구를 하거나 논문을 썼다. 하지만 전공의 대싱 당직 업무까지 맡으면서 연구할 시간이 줄었다.
의정 사태로 병원을 떠난 전공의 공백 탓에 연구보단 진료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는 의료분야 논문 실적 저하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다.
서울의대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연구에 할애하는 시간은 이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과거 연구에 10시간을 썼다면 현재는 3.5시간 밖에 쓰지 못한다는 의미다.
연구 역량 하락은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연구결과 발표에 1년 이상 걸리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파행적 상황은 내년 이후부터 연구성과 급격한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의학한림원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의학분야 연구 논문 수는 세계 13위였다. 그러나 올해 의정 사태로 순위 추락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서울의대 비상대책위원회는 “진료, 교육, 연구는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교수의 책무이지만 이번 사태로 연구 분야가 완전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어 “무너진 연구 역량 복원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며 “의학 연구 역량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데 이대로면 10년은 퇴보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송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