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십년 간 공고했던 의권(醫權)이 최근 급격하게 쇄하는 모습이다. 정부의 통제권에서 의업(醫業)을 수행해야 하는 구조상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최근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상황은 의사 고유의 업무를 다른 직역에게도 허용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심각성은 더한다는 분석이다. 특히 간호사는 물론 의료기사, 조산사, 문신사에 이르기까지 의사 고유 권한의 빗장이 속절없이 풀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반면 의사들이 수행해야 할 각종 의무사항은 날로 늘어나고 있어 의사들의 한숨은 깊어만 가고 있다. [편집자주]
최근 들어 의사들 진료권이 위협받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의정사태 등 혼란한 상황과 맞물려 잇따라 빗장이 풀리는 모양새다.
의료계는 환자안전과 여러 부작용을 이유로 강력 반발하고 있지만 정치권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분위기가 심상찮아 우려를 키우고 있다.
특히 간호사, 조산사, 문신사, 의료기사 등 광범위한 직역에서 의사 고유 업무영역에 편제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국민의힘 최보윤 의원은 최근 의료기사 업무 영역 확대를 골자로 하는 의료기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당 개정안은 의료기사가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업무를 수행한다’는 규정에서 ‘처방·의뢰’에 따르는 경우도 추가하는 게 핵심이다.
4년 전 남인순 의원이 발의했던 법안과 동일한 내용으로, 당시는 의료계 반발로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여야 공동발의라는 점에서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당시 의사 면허권을 침해하고 국민 생명과 안전에 중대한 위해를 초래할 수 있는 법안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번 개정안은 추후 의료기사가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도록 업무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협은 현행 의료법에 의료기사가 의사의 지도 아래 진료나 검사에 종사토록 명시돼 있는 것은 의료행위가 ‘전문적 판단’과 ‘환자 상태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이번 개정안은 ‘의뢰나 처방’ 만으로도 업무 수행이 가능토록 함으로써 의사 감독·책임을 약화시키고 무자격자 의료행위 가능성을 열어두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의협은 “과거 간호법 제정 논의때도 ‘지도 또는 처방 아래’라는 문구는 독자적 진료행위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고, 논란이 있어 심사 과정에서 삭제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에 의료기사법에서 다시금 동일한 조항이 등장한 것은 의사 면허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시도이자 의료체계 안정성을 해치는 반복된 입법 남용”이라고 덧붙였다.
의협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의료체계는 명확한 책임 구조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며 “의사의 지도와 감독 없이 행해지는 진료행위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해외사례를 들며 정당화하려는 시도 역시 타당하지 않다”며 “각국은 법적 권한과 책임구조가 상이하고 국내 건강보험체계와 의료전달체계에서는 단순 비교가 불가하다”고 했다.
특히 “의료전달체계 전반의 혼란으로 이어질 이번 법안 발의를 즉각 철회해야 한다”며 “국민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어떠한 입법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간호사·문신사·조산사 이어 의료기사도 합세
의사 진료권 위협의 시발점은 PA(Physician Assistant, 진료지원인력)였다. 지난해 8월 PA 간호사 합법화를 골자로 하는 간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합법과 불법 경계에서 일하고 있던 PA 간호사 1만6000여 명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함으로 의정사태에서 전공의 빈자리를 메우며 존재감을 각인시켰고, 법제화까지 이어졌다.
최근 봉합 수술보조 튜브 삽관 등 PA 간호사의 구체적 업무범위까지 정해지면서 의사들에게만 허락됐던 의료행위 상당수가 간호사들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얼마 전에는 비의료인의 문신 시술을 허용하는 일명 ‘문신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의료계 반발을 샀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피부과의사회 등은 “의료법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천만한 입법”이라며 즉각 철회를 촉구했지만 최종 입법을 막지는 못했다.
조산사의 방문출산 허용도 추진되고 있다. 의료취약지 산부인과 의사 및 분만 의료시설 부족 등의 문제 해결이 명분이다더불어민주당 서영석 의원은 조산사에 의한 방문조산을 의료기관 외 의료업 허용 범위에 추가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법상 조산사는 조산원을 개설해 임산부의 분만을 돕거나 산부인과나 산후조리원에서의 산후관리 등 정해진 시설에서만 조산행위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취약지 ‘가정분만’ 수요를 고려해 조산사가 직접 가정을 방문해 임산부의 출산을 도울 수 있도록 한다는 게 이번 개정안 취지다.
이에 대해 의료계는 방문조산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응급상황에 대한 대비책 없이 무조건 허용하는 것은 산모와 태아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점입가경은 의료행위 허용 범위를 구분하기 위한 별도의 전담조직 신설이다.
지난 9월 국회는 의료현장의 업무범위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업무조정위원회’ 신설을 골자로 하는 보건의료기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의료현장에서 오래된 난제인 직역 간 업무 범위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전담기구다.
보건의료인력 면허제도는 ‘종별 면허’ 구조를 따른다. 과거 인력 부족 속에 직역 구분이 비교적 명확했던 시절에는 문제가 없지만 의료기술과 진료 분야가 확장되면서 전통적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용, 재활, 예방, 데이터 기반 진료 등 신영역이 등장했고, 현장에서는 직역 간 업무가 자연스럽게 겹치기 시작했다.
의료기술 발전과 법령 개정 속도의 간극 탓에 업무범위 분쟁이 심화됐고, 급기야 이번에 각 직역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전담조직까지 만들어지는 상황을 맞았다.
한 의료계 인사는 “공고했던 의사 고유 진료행위 빗장이 속절없이 풀리고 있다”며 “의정갈등 사태를 계기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되는 모습”이라고 우려했다.
즐비한 ‘의무화’ 부담 가중…구인난 속 인력기준 강화법 추진
이처럼 의사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권리는 줄어드는 반면 앞으로 지켜야할 의무는 늘어나는 양상이 또렷하다. 인력, 시설은 물론 각종 시스템까지 의무화 항목도 다양하다.
실제 병원 경영환경이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연이어 의료인력 배치 의무화가 추진되고 있어 일선 병원들 부담을 가중시키는 모습이다.
현재 국회에는 의료기관의 배치 의료인력 기준을 강화하는 법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의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김윤 의원은 의료기관별로 의료인력 적정기준을 법제화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보건복지부장관이 의료기관 종류별로 의료인력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준수하는 기관에 행정적 재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토록 하는 게 골자다.
간호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이 발의한 간호법 개정안 역시 우려를 키우고 있다.
해당 개정안은 복지부장관이 의료기관 종별 및 근무조별, 간호단위별로 간호사 배치기준을 정하도록하는 게 골자다. 즉, 간호사 1인당 최대 담당 환자 수를 법제화 한다는 의미다.
병원들은 법적 인력기준 준수를 위해 간호인력을 대폭 확충해야 하고, 이는 현실적으로 막대한 인건비 부담으로 직결될 것이라며 우려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뿐만이 아니다. 영양사, 사회복지사 등 다른 직종 역시 인력기준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치과의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의원은 환자의 건강권 보호를 기치로 병원급 의료기관에 임상영양사 배치를 의무화 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존에는 입원시설을 갖춘 종합병원, 병원, 치과병원, 요양병원에 1명 이상의 영양사를 배치토록 하고 있지만 이 개정안에서는 임상영양사 배치를 의무화했다.
더불어민주당 4선 중진 남인순 의원은 종합병원은 물론 병원급 의료기관까지 사회복지사 배치를 의무화 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법에는 종합병원에 1명 이상의 사회복지사를 배치토록 하고 있지만 개정안은 병원급 의료기관까지 그 범위를 확대토록 했다.
의료와 복지의 유기적 연결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를 줄인다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인력 배치 의무화는 일선 중소병원들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분석이다.
‘환자 보호’ 명분에 진료기록도 맘 편히 못보는 현실
의사들에게 드리운 의무화 무게는 비단 인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자 보호’라는 취지 하에 의사들의 수술이나 정보 열람 기록을 의무화하는 정책이 연이어 추진되고 있다.
실제 복지부는 최근 수술 참여 의료진과 수술 방법·내용 등을 의무적으로 기록하도록 하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수술실에 입장한 의사 등 의료인의 이름과 역할, 수술 일시·방법·내용·시간·경과를 반드시 남겨야 한다.
이는 이미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 등 제도적 보완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령 수술·대리 수술 사례가 계속 발생하는 데 따른 조치다.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는 전자의무기록(EMR) 무단 열람을 방지하기 위해 의료기관이 별도 접속기록을 보관토록 하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발의한 의료법 개정안은 의사가 전자의무기록을 열람하는 경우에도 접속기록을 별도로 보관토록 하는 게 골자다.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응급실 뺑뺑이’를 해소한다는 취지의 응급실 관련 의무화 조항도 즐비하다.
의료기관에 응급실 수용능력 여부를 실시간 보고토록 하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얼마 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의료기관은 응급의료기관 시설·인력·장비 등의 운영 상황과 수용능력 확인에 필요한 사항을 의무적으로 통보토록 하는 게 골자다.
중앙응급의료센터는 이를 응급의료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개하도록 하고, 운영 상황을 통보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통보하는 경우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토록 했다.
의료인 집단행동 시 필수의료 서비스를 중단할 수 없도록 하는 일명 ‘의사파업 금지법’도 의사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해당 개정안은 의료계가 단체행동에 나서더라도 응급의료·중환자 치료 등 필수의료 행위를 유지해야 하며,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위반하면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해지는 게 골자다.
위반 시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아울러 단체행동 시 필수유지의료행위 기준에 부합하는 근무계획을 세워 의료기관장 및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통보해야 한다.
이 외에도 인권침해를 당한 종사자 치료 지원 및 상시적 고충처리기구 설치, 피해구제 지원 등 의료기관 운영자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보건의료인력지원법 개정안이 추진 중이다.
이러한 책임을 이행하지 않거나 인권침해를 당한 종사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경우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토록 했다.
한 의료계 인사는 “갈수록 의사의 권리는 줄어들고 의무만 늘어나는 현실에 자괴감이 든다”며 “이러한 진료환경에서 계속 의업(醫業)을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겨울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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