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에 환자가 없는데 분만수가를 아무리 올려도 병원을 유지할 수 없다. 의료 공급체계를 다시 설계해야 하고 민간병원과 동일한 회계기준으로 채산성을 평가하는 구조도 바꿔야 한다. 수가와 공공병원 투자, 인력, 환자안전 정책이 각각 따로 움직여서는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백주 을지의대 교수(의료혁신위원회 위원)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역·필수의료 붕괴가 단순 건강보험 수가 조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고 진단하며 이같이 말했다.
인구 감소와 수도권 환자 쏠림으로 지역 의료 수요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진료행위별 보상만 올리는 방식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공공병원을 민간병원과 동일한 회계·수익성 기준으로 평가하는 구조를 개선하고, 공공병원 신축과 이전을 가로막는 예비타당성조사 기준도 손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국가 보건의료정책을 종합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국무총리급 기구로 격상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그는 “수가, 투자, 인력, 정책이 각각 따로 움직여서는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5년 단위 보건의료 발전계획을 세우고 예산, 인력을 함께 배치하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만수가 올렸지만 혜택은 수도권 병원에 집중”
나 교수는 지역의료 붕괴가 가장 먼저 드러난 분야로 분만의료를 꼽았다.
정부가 분만취약지 지원과 분만 수가 인상 정책을 추진했지만, 정작 의료진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다.
그는 “정부는 가격을 올리면 공급도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분만수가를 크게 인상했지만 수혜는 수원, 동탄, 서울 등 원래 분만 건수가 많던 지역에 집중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역은 분만 건수 자체가 적고 인구 감소로 앞으로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며 “수가가 올라도 의사 여러 명을 채용하고 당직체계를 운영할 정도 수입이 생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지역 종합병원이 외형만 유지할 뿐 실제 필수의료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나 교수는 “지역 종합병원에 산부인과가 있어도 분만을 받지 않고 외과가 있어도 응급수술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이름은 종합병원이지만 지역 주민에게 필요한 종합병원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진료과 하나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의사가 최소 3~4명은 있어야 당직, 응급수술을 담당할 수 있다”며 “당장 지역은 환자가 적어 수가만으로 필요 인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모든 국민은 거주 지역과 관계없이 같은 세금과 건강보험료를 낸다”며 “서울에 산다는 이유로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받고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응급수술조차 받기 어렵다면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는지 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의료 역할 수행할수록 적자…민간병원 방식 회계·평가 개선해야”
특히 나 교수는 공공병원을 확대하는 것 못지않게 기존 공공병원에 적용되는 회계와 평가체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공공병원과 국립대병원이 민간 의료기관과 유사한 기업회계 기준으로 수익성과 인건비 비중을 평가받으면서 공공적 역할을 수행할수록 경영상 불리해지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또 지자체 심의 등을 거쳐 비급여 가격을 민간병원보다 낮게 책정하는 사례도 있어 수익성 확보에 애초에 제약이 크다는 설명이다.
나 교수는 “공공병원은 코로나19나 메르스와 같은 감염병에 대비해 환자가 없어도 공간과 인력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 준비 자체에는 수가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보험이 없거나 본인부담 능력이 부족한 환자도 받아야 하고 비급여 가격도 민간병원보다 낮게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데도 민간병원과 동일한 회계기준으로 채산성을 평가받는다”고 지적했다.
국립대병원 인력 운영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고 봤다.
정부가 권역외상센터나 권역모자의료센터에 별도 인건비를 지원해 신규 의료진을 채용하더라도 기존 교수보다 급여가 크게 높아지면서 내부 인력의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 교수는 적은 인력으로 당직과 진료를 감당하고 있는데 지원사업으로 채용된 의사 급여가 기존 교수보다 몇 배 높으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월급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할 의사와 간호사 등 인력 정원을 늘려야 한다”며 “동료가 있어야 당직을 나누고 학회도 참석하며 휴식도 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공병원 신축 막는 예타 기준도 바꿔야”
공공병원 신축과 이전 사업에 적용되는 예비타당성조사도 지역 필수의료 확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목했다.
지역 공공병원은 인구가 적고 고령 환자 비중이 높아 경제성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생명과 건강에 미치는 효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비용편익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것이다.
나 교수는 “영주와 상주 적십자병원처럼 시설이 노후해 이전하거나 새로 지어야 하는 병원이 있지만 국비가 일정 규모 이상 투입되면 예타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공공병원은 돈을 벌기 위해 짓는 시설이 아닌데 경제성과 채산성을 중심으로 평가하면 사실상 짓지 말라는 것과 같다”며 “공공병원은 예타를 면제하거나 적어도 평가 기준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역에는 노인이 많고 뇌혈관질환이나 만성질환 진료 수요가 크지만 노인을 치료해 얻는 사회적 편익이 경제성 평가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며 “현재 기준은 공공의료와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그는 올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기능 강화에 대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보건의료기본법은 정부가 5년마다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발전계획과 투자계획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나 교수는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인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국무총리급으로 격상하고 건강보험, 공공보건의료, 환자안전, 보건의료인력 관련 위원회를 산하에 두는 것에 대해 제안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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