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고 수준 의료데이터 강국으로 꼽히는 한국이 정작 ‘데이터 활용’과 ‘상용화’ 단계에서는 병목 현상에 갇혀 있다는 전문가 진단이 나왔다.
인공지능(AI) 기술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낡은 규제와 경직된 제도 탓에 기업들이 연구개발 대신 행정 절차에 매달리고 있어 규제 혁신의 시급하다는 의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근 개최한 ‘2026년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국내외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모여 국내 의료AI 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제도적 개선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박래웅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방대한 원천 데이터가 시장 진입과 임상 배치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적 원인으로 ‘6대 병목’과 ‘규제 시차’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박 교수는 “100% 전국민 단일보험자 체계에 94%에 달하는 EMR 보급률, 3조 건이 넘는 청구 데이터, 8200만명 규모의 공통데이터모델(CDM) 코호트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국내 중소·벤처기업들은 복잡한 규제와 절차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리콘밸리와 글로벌 기업들이 AI 모델 고도화에 속도를 내는 사이, 국내 기업들은 단 한 건의 환자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병원 협약,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및 데이터심의위원회(DRB) 심의, 가명화, 반출 심의, 결합 절차를 거치며 수개월에서 수년을 허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화 경로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데이터 접근성 ▲원천 데이터 추출 ▲표준화 비용 ▲데이터 품질 ▲인허가 규제 경로 ▲보험수가 및 구매 주체 부재 등 ‘6대 병목’을 지목했다.
병원마다 상이한 코드 체계와 폐쇄적인 EMR 구조로 인해 표준화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혁신 기술을 개발해도 별도 수가가 책정되지 않고 기존 영상 판독료 등에 묶여 시장 진입이 좌절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박 교수는 1초 이내 96.6% 전문의 판독 일치율을 보이는 흉부 X선 생성형 AI 모델(M4CXR) 사례를 들며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데이터 추출과 표준화 등 모델 개발 이전 문제와 인허가, 수가 등 시장으로 가는 길이 병목”이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석학들 역시 의료 AI 혁신의 걸림돌은 기술 자체가 아닌 낡은 제도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에릭 서덜랜드 OECD 선임 보건경제학자는 21세기 보건의료 시스템 구축의 핵심 장애요인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기 훨씬 이전에 형성된 제도, 프로세스, 워크플로우에 있다고 강조했다.
스티븐 더켓 멜버른 대학교 명예교수 또한 복잡한 승인 절차 사슬을 걷어내고 조직 전반에 피드백 루프를 설계하는 유연한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난관을 뚫기 위해 공통 표준체계인 ‘KR Core’ 전면적 확산과 함께 심사평가원이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가 차원 보건의료 데이터를 총괄 관리하는 심평원이 데이터 관리자이자 실사용근거(RWE)를 창출하는 엔진으로 기능하고, 가치 기반 수가체계를 마련해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시장을 열어줘야 한다는 제언이다.
즉, 데이터가 원활하게 흘러야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만큼 법령 간 중복 관할을 해소하고 규제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는 전향적인 규제 개혁이 시급한 시점이라는 의미다.
박래웅 교수는 “데이터가 흐르는 곳에서 디지털 헬스케어가 성장한다”며 “심평원이 AI 보건의료 생태계 핵심 연결고리로서 실사용 근거 엔진 역할과 표준 거버넌스 리더십을 발휘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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