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료기록상 정신건강의학과 치료 내역이 없더라도 심리부검 결과 등을 종합해 직무상 과로와 우울장애로 인한 사망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한 판결이다. 고인의 명예를 되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7년이다.
원고 승소…"유족에 2억여원 사학연금 지연손해금 등 지급" 판결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7민사부(재판장 하성원)는 최근 고 교수 배우자와 부모 등 유족 3명이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이하 사학연금)을 상대로 제기한 유족보상금 등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사학연금 측에 유족 3명에게 각각 1억9465만여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고, 2026년 8월 25일부터 매월 175만5100원의 유족연금을 분할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살인적인 과로와 인력 부족을 인지하고도 실질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고 위기 개입 의무를 방치한 병원 측의 환경적 요인을 명확히 짚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망인은 지난 2001년 삼성서울병원 호흡기내과 임상강사로 근무를 시작해 2014년 성균관대 의대 정교수로 승진했다.
결핵 및 비결핵 항산균 폐질환(TB-NTM) 분야 전문가로서 재직 기간 동안 SCI급 189편을 포함해 총 441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4000명이 넘는 환자 코호트를 구축하는 등 국내외에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쌓았다.
하지만 연구와 진료 환경은 극심한 과로를 수반했다.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등 동급 대형병원들이 2명의 교수를 두고 있던 것과 달리 망인은 2017년 9월 후임 임상강사가 채용되기 전까지 삼성서울병원에서 해당 분야를 홀로 책임졌다.
망인은 주 7일, 주당 80시간에서 100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근무를 이어갔으며, 외래진료 준비와 검사결과 정리를 위해 사비로 직원을 고용하기도 했다.
망인은 2018년 10월부터 삼성서울병원장에게 이메일로 “이러다 과로사할지도 모르겠다. 삼성서울병원으로부터 받는 실제 지원이나 배려가 전혀 없다”며 수차례 고통을 호소했고 이런 요청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 의향을 밝혔다.
보충인력 문제·단톡방 배제·코호트 폐기 언급…상실감 극대화
재판부는 과중한 진료 업무 외에도 병원 측의 미흡한 지원 대처와 동료 교수들과의 갈등이 망인의 심리 상태를 극도로 악화시켰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망인은 지속적으로 인력 충원을 요청해 2017년 가을 후배 교수를 영입했으나, 병원 측은 해당 인력에게 다른 진료 업무까지 부과해 실질적인 과로 해소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에 망인은 병원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후배의 앞길을 막았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원내 갈등도 깊어졌다. 삼성서울병원 호흡기내과 일부 교수들은 지난 2018년 10월 망인을 제외한 단체 카카오톡 방을 개설했고, 이에 상심한 망인은 카카오톡 앱 자체를 삭제하기도 했다.
사직서가 수리된 뒤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압박은 이어졌다.
당시 삼성서울병원장은 망인이 10여 년간 구축한 4000명 규모의 코호트 검체를 두고 ‘폐기할 것인지’ 묻는 이메일을 보냈고, 후임자의 진료 부담을 덜기 위해 기존 환자들을 망인이 옮겨갈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취지의 요구를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망인은 2019년 8월 초 자택에서 약물과용 상태로 발견돼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 치료를 받았다.
직후인 같은 달 21일 열린 환송회에서도 동료 교수 대다수가 지각하고 단기 계약직 직원의 송별회와 함께 진행되는 등 굴욕감을 겪었고, 결국 환송회 참석 직후 자택에서 투신해 숨졌다.
망인 사망 후 유족 요구로 열린 추모식에도 병원장과 분과장 등 일부를 제외한 호흡기내과 교수 대다수는 참석하지 않았다.
사학연금 ‘정신과 진료기록 부재’…“법원 심리부검 신뢰성 충분”
사학연금은 망인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진료를 받은 객관적 기록이 없고, 자발적으로 과다한 업무를 수행했다는 점 등을 들어 유족보상금 지급을 거부해 왔다.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 역시 진료기록만으로는 직무상 환경에 의한 자살 위험이나 우울증 여부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소견을 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원 감정인이 진행한 심리부검 결과를 전격 수용했다.
심리부검 감정 결과 망인은 기질적 취약성 등 개인적 위험요인이 없었던 반면, 과도한 업무량과 조직 내 배척, 병원 관리자의 적극적인 위기 개입 부재 등으로 인해 심각한 인지적·정서적 기능 저하를 겪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사망자가 생전에 주요우울장애 진단을 받지 않았더라도 여러 정황과 전문적 견해를 토대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 판단할 수 있다”며 “자살자의 경우 정신과 기록이 없으면 의무기록만으로 원인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과학적 조사 방식인 심리부검의 신뢰성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이어 “삼성서울병원장 역시 망인의 후임자가 쓰러질 것을 우려해 환자 전원을 요청했을 정도로 기존 업무량이 과다했음을 알고 있었다”며 “극심한 스트레스와 무력감 속에 합리적 판단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에 이른 만큼 직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망인의 아내인 원고 이윤진 씨는 의료진 개개인의 헌신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적정 인력과 안전망을 구축해 구조적인 비극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씨는 “그 당시 단 한 명의 교수만 더 채용해 줬어도 남편이 사직을 고민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판결을 통해 남편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를 돌보고 의학 발전에 힘쓰는 의료진이 살인적인 격무와 배척 속에서 무너지는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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