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転禍爲福(전화위복), 因敗爲功(인패위공)’이라는 말이 제격이겠다. 화를 바꿔 복이 되게 하고, 실패를 밑천으로 성공을 이뤄낸다. 울산대학교병원이 그랬다. 6년 전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에서 고배를 마셨을 당시 병원 분위기는 참담했다. 아까운 점수 차는 탈락의 아픔을 더했다. 하지만 울산대병원은 심기일전의 각오로 제4기 평가에 재도전했고, ‘3차 병원’ 타이틀 탈환에 성공했다. 그 기세를 몰아 이번 제5기에는 전체 신청기관 54곳 중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6년 사이에 그야말로 ‘기적’을 일궈낸 셈이다. 더욱이 서울 빅5 병원에 준하는 그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는 점에서 지역의료 저력을 입증했다는 평가다. 그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정융기 병원장 소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전국 Top3’라는 성적에 도취되기보다는 ‘지역의료에 희망을 쏘아 올렸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편집자주]
과감한 투자‧철저한 분석‧안일함 지양
수려한 시설‧장비도 의료진 없으면 무용지물
지난해 연말 병원계가 술렁였다. ‘국내 최상위 의료기관’ 타이틀 획득 경쟁에 나선 대학병원들은 본지를 통해 공개된 성적표에 크게 동요했다.
위상과 직결된 ‘상급종합병원’ 진입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만큼 당락의 가늠자인 성적에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특히 이번 지정평가는 △입원전담전문의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진료량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한 탓에 병원들 모두 초긴장 속에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집계결과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104점 만점에 102.47점을 받으며 1위, 서울아산병원이 102.40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3위’였다. 수도권 대형병원이 포진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울산대학교병원이 세 번째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울산대병원은 102.19점을 받으며 전체 신청기관 중에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빅5 병원들 보다 높은 순위였다.
수도권 대형병원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지방 대학병원이 최상위권에 오르면서 병원계의 시선은 울산대병원에 집중됐다.
정융기 병원장은 그 비결을 묻는 질문에 △과감한 투자 △철저한 분석 △안일함 지양 등 3가지 전략이 주효했다고 답했다.
실제 울산대병원은 권역책임의료기관으로서 빈틈없는 필수의료, 중증의료 수행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인력, 장비, 시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CAR-T 세포치료센터다. 병원은 지난해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CAR-T(카티)세포치료센터를 개소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CAR-T 세포치료센터가 문을 연 것은 울산대병원이 처음이었다. 전국적으로는 빅5 병원에 이어 6번째다.
CAR-T 세포치료는 몸속에 있는 면역세포인 T세포를 추출·편집해 암세포를 공격하게 만드는 환자 맞춤형 혈액암 치료법으로, 암 치료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최첨단 치료법이다.
울산대병원은 지역 혈액암 환자들의 생존율 향상과 원정진료 불편을 해소하고자 15억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 규모의 세포처리시설을 마련했다.
정융기 병원장은 “CAR-T 센터 개소는 수도권과 의료격차를 허무는 시발점이자 지역환자들이 수도권병원과 동일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특히 “시설, 장비, 인력 등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기관에만 센터 개설권이 주어지는 만큼 울산대병원의 혈액암 치료가 세계적 수준임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료진 확보에도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특히 대학병원 진료시스템 운영의 밀알인 전공의 확보를 위해 전국 최고 대우를 보장했고, 선발 시스템 공정성 확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실시하는 전국 수련병원 평가에서 2년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하며 전공의들이 가장 선호하는 병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초임 교수진에게도 전국 최고 연봉을 제시하는 등 의료진 확보에 아낌없는 투자를 이어온 결과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의사인력난 고민을 덜 수 있었다.
정 병원장은 “아무리 수려한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더라도 의료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며 “인건비 부담이 적잖지만 상급종병 본연의 역할 수행을 위해 망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상급종병 지정평가도 일종의 시험인 만큼 철저한 분석과 준비가 필요하다”며 “지난 3주기 실패가 안일암에 기인했던 만큼 이후로는 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달라진 위상, 벤치마킹 요청 쇄도…전국구 병원 자리매김 노력
공공재원 민간병원 투입 '성공모델' 되도록 최선
국내 최상위권 의료기관이라는 명성은 울산대학교병원의 위상도 변화시켰다.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 전후로 전국 병원에서 벤치마킹 요청이 쇄도 중이다.
수도권은 물론 지방 대학병원에 이르기까지 울산대병원의 진료, 연구, 교육 등 전반적인 운영 시스템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대기 중이다.
특히 견학 신청 기관 중에는 동일 진료권역에서 경쟁을 벌인 병원도 있지만 울산대학교병원은 기꺼이 노하우 공개를 수락했다.
정융기 병원장은 “상급종합병원 탈락, 탈환, 수성 등 다채로운 경험을 한 탓인지 벤치마킹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며 “국내 의료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 수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행보에는 ‘전국구 병원 도약’이라는 자신감이 투영돼 있다. 수도권 대형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의료 수준이 입증된 만큼 지역을 넘어 전국을 제패하겠다는 포부다.
전략 수립도 이미 완료했다. 지난해 외부기관이 실시한 컨설팅 결과를 토대로 내부 논의를 거쳐 ‘전문화 병원’이라는 전략을 완성했다.
기존의 전문과목별로 운영되던 진료 시스템을 전면 개편해 질환별 전문화 병원 형태로 전환함으로써 진료체계의 고도화를 도모하겠다는 복안이다.
우선 암병원, 심장병원, 뇌병원 등 3개 전문화 병원을 시작으로 향후 척추병원 등 영역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다만 후속 전문화 병원은 각 진료과에서 지원할 경우 내부 심사를 거쳐 승인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분야나 개수는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정융기 병원장은 “앞서 암병원 등의 사례에서 입증된 만큼 전문화 병원 시스템은 진료의 고도화를 실현할 수 있고 환자들의 만족도 제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궁극적 지향점은 전국구 병원”이라며 “전문화 병원이 활성화 되면 자연스레 전국 환자들이 찾는 분야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국구 병원’은 시쳇말로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의료질평가 △적정성평가 △응급의료기관평가 △간호간병통합서비스평가 등 정부가 시행하는 각종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기록 중이다.
울산대병원은 권역책임의료기관으로 지역암센터, 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 권역외상센터 등 30여개의 국책사업을 수행하며 지역사회 필수의료를 책임지고 있다.
다만 국공립병원이 없는 울산에서 지역의료, 필수의료를 책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적 지원에는 상당 부분 소외돼 있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했다.
정융기 병원장은 “정부는 권역책임의료기관을 중심으로 한 지역완결형 의료체계를 천명했지만 지방에서 느끼는 체감도는 크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는 ‘공공병원’과 ‘민간병원’이라는 이분법적 접근 보다는 두 영역을 아우를 수 있는 하이브리드 개념의 의료 시스템을 제언했다.
일례로 최근 인천광역시 제2의료원 건립 예산을 송도세브란스병원 설립에 활용하는 방안에 주목했다. 공공예산을 투입해 건물을 완공한 뒤 병원이 소유권 없이 위탁 운영하는 방식이다.
새병원 건립을 추진 중인 울산대학교병원 역시 울산의료원 건립 예산이 투입될 경우 민간병원과 공공병원 간 소모적 경쟁을 피하고 보다 안정적인 공공의료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융기 병원장은 “공공예산을 민간 의료기관에 투자해 성공한 공공의료의 성공모델이 되고자 한다”며 “국가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전국구 병원 사례가 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한편, 정융기 병원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1987년)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병원 연수를 마쳤다.
간담도와 췌장 등 복부 영상분야 권위자이며 지난 1998년 울산대병원에 부임, 기획실장과 진료부원장 등 주요보직을 두루 거친 후 2017년 제11대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제12~14대 병원장으로 연임하며 대학 부속병원 승격, 상급종합병원 재진입 등 뛰어난 리더십과 안정적 경영으로 병원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다.
특히 다양한 국책사업 참여를 통해 지역 책임의료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울산시 감염병대책단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하며 지역사회의 큰 신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