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12월 31일 밤 11시. 새해를 고작 1시간 남긴 이맘때 더 분주해지는 병원 2곳이 있다. 평소와 달리 산모와 태아의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출산 시각까지 정확히 자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분만 유도제 투입 등 적절한 조치를 하는 의료진과 카메라를 대동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병원 직원 사이에서는 긴박감과 더불어 비장함까지 감돌았다. ‘경쟁병원’의 상황을 알 길이 없으니 이들은 눈앞에 있는 닥친 임무에 집중 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0시가 되면서 처음으로 바깥세상을 접한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진료실 안을 가득 메웠다. 직원은 황급히 사진을 찍으면서 부모에게 소감을 물었다. 부모 답변은 언론에 배포될 자료에 고스란히 삽입됐다.
병원 직원이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은 문자나 전화. 미리 기자들에게 연락은 돌렸지만, 한 번 더 새해둥이 탄생 소식을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경쟁병원보다 우리병원 자료를 꼭 먼저 써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위 상황은 제일병원과 차병원의 산부인과에서 매년 12월 31일 벌어졌던 풍경을 가정한 내용이다. 이처럼 새해둥이 관련 소식조차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여왔던 두 병원의 경쟁 구도를 당분간 볼 수 없을 전망이다.
최고 여성전문병원으로 성장해 온 제일병원
1963년 국내 최초 여성전문병원으로 개원한 제일병원은 그동안 국내 여성의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쌓으며 명성을 높여왔다.
▲국내 최초 복강경을 이용한 영구피임술 시술 성공(1973년 3월) ▲국내 최초 산부인과 분야 초음파 진단법 도입(1974년 6월) ▲국내 최초 레이저 복강경 수술 성공(1988년 10월) 등 ‘국내 최초’ 수식어가 붙은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1988년 3월에는 아시아권 국가 최초로 동결수정란을 이용한 시험관아기 임신 시술에 성공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실력과 권위를 인정받는 우수 의료기관으로 거듭났다.
이 같은 수술 및 연구실적에 힘입어 제일병원은 2000년대 초반 전국 분만 실적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고위험 산모군 치료는 유명 대학병원보다 제일병원이 더 전문적’이라는 입소문까지 퍼지면서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특히 이영애, 고현정 씨 등 유명 연예인들이 출산한 의료기관 으로 알려져 제일병원은 여성전문병원으로써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왔다. 이때 당시만 해도 제일병원의 몰락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영악화에 우수 의료진 이탈까지 ‘속수무책’
시련은 2005년부터 다가왔다. 제일병원 창립한 고(故) 이동희 이사장은 고(故)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조카였다. 창업자의 뜻을 받들어 제일병원은 2005년 11월 이전에는 삼성그룹에 소속됐다.
이후 삼성그룹 계열에서 분리되고, 이동희 이사장의 장남 이재곤 이사장이 부임하면서 경영실적이 크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극심한 출산율 저하로 인한 외부적인 환경 요소보다 경영진의 투자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실제로 새로 부임한 이재곤 이사장은 건물 리모델링과 함께 건강검진센터, 여성암센터, 임상연구소 등 무리한 투자를 감행 했다. 특히 관련 시설이 들어설 부지 확보에 공을 기울이면서 과도한 부동산 차입 비용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경영진은 인건비 및 부대비용 축소를 강행했고, 결국 노조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됐다. 임금삭감 등으로 노사 간 갈등이 더 심해지면서 지난해 6월 총파업으로 인해 정상진료에도 차질을 빚게 됐다.
우수 의료진 이탈도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경영환경 개선을 위해 병원 측이 임금삭감과 더불어 수익 확보를 위한 주말진료 까지 시행하면서 환자 진료에 극심한 피로를 느낀 의료진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행정직원 역시 상당수가 다른 의료기관에 재취업하면서 현재 제일병원은 ‘경영난’, ‘인력부족’, ‘환자감소’라는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제일병원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을 만큼 경영상황이 나빴다”며 입을 굳게 닫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법원이 파산 직전이었던 제일병원의 법정 관리를 승인해 자율 회생 절차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금성 자산 압류가 일부 해제되면서 자금 흐름에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됐다.
또 제일병원에서 쌍둥이를 낳은 배우 이영애씨가 인수 컨소 시엄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병원 정상화에 대한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여전히 일각에서는 이미 현금 보유량이 거의 바닥난 제일병원이 체불된 임금을 지불하면서 새로운 인력까지 충원할 여력이 있겠느냐는 부정적인 관측을 내놓고 있다.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 후폭풍 극복하고 질주하는 차병원
이처럼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제일병원과 달리 차병원그룹은 최근 들어 더욱 세(勢)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자체 여성의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쌓아온 연구실적으로 글로벌 바이오그룹으로 거듭나겠다는 목표까지 설정했다.
1960년 고(故) 차경섭 이사장이 설립한 차산부인과에 뿌리를 둔 차병원그룹은 1984년 차광렬 총괄회장이 강남차병원을 개원하면서 본격적인 성장기에 도입하게 된다.
차광렬 총괄회장은 분당차병원, 분당차여성병원, 구미차병원, 대구여성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 IVF센터, 차바이오텍, 차케어스, 차바이오F&C 등 대형 의료네트워크를 갖춤으로써 병원 경쟁력을 높이는데 한껏 공을 들였다.
또 지난 2010년 세워진 세계 유일의 안티에이징 라이프센터 차움은 양·한방 의료진 뿐 아니라 스파, 푸드, 운동 분야의 최고 전문가 그룹이 개개인에 맞는 최적의 맞춤 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2016년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 당시 박근혜 정부에 의료서비스 관련 각종 로비를 제공해 특혜를 받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특검 수사과정에서 모든 의혹에 대해 무혐의 판정을 받고 환자 유치 등 병원 경영에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으면서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 의료계 인사는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차병원그룹 인지도만 더 높아졌다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며 “그때 당시 차움에 가면 다른 의료기관에서는 제공받을 수 없는 맞춤형 VIP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전했다.
신성장동력 자리매김할 ‘일산차병원’ 개원 초읽기
올해 차병원그룹은 난임 치료 등 여성 질환 분야에서 한 단계 더 높은 도약을 꿈꾸고 있다. 지상 13층, 지하 8층 규모(연면적 7만2103㎡)에 약 300병상이 들어서는 일산글로벌라이프 센터가 개원을 앞두고 있다.
‘일산차병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센터가 주목받는 이유는 국내 환자 뿐 아니라 해외 환자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차병원그룹은 이미 미국 할리우드 차병원, 호주 난임센터, 일본 도쿄셀클리닉 등 전 세계 곳곳에 의료 네크워크를 구축한 상황이다.
따라서 해외환자 유치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전망 되고 있다. 경영난으로 인해 국내 환자 유치조차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제일병원의 현 주소와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김춘복 차병원그룹 성광의료재단 이사장은 “일산글로벌 라이프센터를 통해 고양시 보건의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며 “이와 더불어 전 세계 각국 환자를 유치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하겠다”고 공언했다.
현재 차병원그룹은 일산글로벌라이프센터가 인천국제공항, 김포공항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대규모 인구가 살고 있는 서울과도 근접하다는 점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지리적 여건이 우수하기 때문에 국내외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게 그룹 측 분석이다.
또 고양시 일산서구에 위치한 대규모 전시·박람회장 킨텍스에서 열리는 각종 국제 박람회와 인근 호수공원도 병원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 외 차병원그룹이 일산글로벌라이프센터 건립을 통해 의사· 간호사·행정직원 약 2350명, 판매·업무시설 인력 약 860명 등 총 3700명에 육박하는 일자리 창출 효과에 대해서도 지역 내 민심이 후한 편이다.
차병원그룹은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지난해 11월 고양시와 MOU를 맺은 바 있다”며 “일산글로벌라이프센터가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외국인 환자 유치를 통해 의료관광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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