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신영 기자 = 감기약을 먹고 치명적 부작용이 나타나 실명하게 됐더라도 제약사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부산에 사는 김모(37)씨는 지난 2010년 1월 감기몸살 기운이 있어 A제약사에서 판매하는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의 감기약을 사먹었다.
약을 이틀이나 먹어도 증상이 낫지 않고 오히려 온몸이 쑤시고 얼굴까지 붓자 김씨는 사흘째 되는 날 인근 의료원을 찾아 진통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했다. 하지만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온몸이 가렵고 발진이 나타났다. 눈은 충혈되고 열도 많이 났다.
결국 김씨는 대학병원에서 약물 부작용인 스티븐스존슨증후군(SJS), 그 중에서도 상태가 심한 증상을 지칭하는 중독성표피괴사융해증(TEN)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SJS와 TEN은 비정상적인 면역반응으로 피부가 벗겨지고 입과 호흡기 등의 점막이 파괴돼 심하면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환으로, 증세가 상대적으로 약하면 SJS, 심한 경우 TEN으로 분류한다. TEN의 치사율은 30~40%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김씨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각막이 손상돼 두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다. 눈 수술만 10여차례 받았지만 15분마다 눈에 안약을 넣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김씨는 이듬해 A제약사와 초기 치료를 했던 동네 의료원, 약을 팔았던 약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SJS를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데도 A사 감기약에는 SJS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또 부작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약사와 약물 부작용일 수 있는지 제대로 살피지 않고 진통제 등만을 처방해 상태를 악화시켰다는 이유로 동네 의료원도 소송대상에 포함시켰다.
법원은 그러나 감기약을 먹고 실명했더라도 제약사 등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한숙희 부장판사)는 김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3일 밝혔다.
재판부는 "김씨가 A제약사 감기약 때문에 SJS가 발병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설명서에 SJS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고열이나 발진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복용을 중단하고 의사와 상의하라는 문구가 있기 때문에 제약사에 과실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SJS의 원인이 되는 약물이 100가지가 넘고 김씨는 A제약사 감기약 외에도 동네 의료원에서도 약을 처방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약물이 A제약사 제품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또 국내 학계에서는 아세트아미노펜으로 SJS가 발생했다고 보고된 사례가 아직 없었고 해외에서 5건 보고됐을 뿐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동네 의료원이 초기에 증상을 알아내지 못해 상태를 악화시켰다거나 약사가 일반의약품을 팔 때 매우 예외적인 부작용까지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씨를 대리한 법무법인 우성의 이인재 변호사는 "A사 약에는 SJS에 대한 언급이 없어 표시상의 결함이 분명히 있고, 이런 약을 먹고 실명까지 하게 됐는데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항소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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