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봉에 휘둘리는 청진기…판결 따라 '좌지우지'
정부 대상 행정소송 급증…정책 현안 등 법원 판단에 명암 엇갈려
2013.06.04 20:00 댓글쓰기

몇 해 전부터인가 법원이 의료계 주요 이슈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되고 있다. 법봉의 향배에 따라 의료계 전체가 휘청되는 상황이 잇따라 연출되는 상황이다. 법관과 의사의 만남은  의료사고와 관련한 민사소송이 주를 이뤘던게 사실. 하지만 건강보험 재정절감 논리를 앞세운 의료계 옥죄기 정책이 지속되면서 불합리한 정책에 반발한 행정소송 건수가 부쩍 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의비급여, 존엄사 등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의료현안의 결정권이 법원에 주어지면서 판결에 따라 의료계가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법봉에 휘둘리는 청진기, 그 실태를 조명한다.

 

법에 호소하는 의료계

 

가장 뚜렷한 변화는 정부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 급증세다. 이는 의료기관과의 분쟁 소지가 가장 많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대상 행정소송 건수 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근 5년간 심평원에 제기된 행정소송 건수는 2008년 45건, 2009년 62건, 2010년 77건, 2011년 72건, 2012년 82건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및 운용을 담당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역시 행정소송이 매년 늘고 있다.

 

2009년 81건이던 건보공단 대상 요양급여비용 행정소송은 2010년 110건, 2011년 136건으로 매년 두 자리 수 이상 급증했다.

 

그 만큼 의료정책에 당한 억울함을 법봉에 호소하는 의료기관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들 의료기관의 명암은 법봉의 향배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의료계에는 정부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게 사실이다.

 

실제 2000년 7월부터 2006년 7월까지 건강보험과 관련해 복지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의료기관의 승소율은 10%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들어 법원이 부당한 의료정책을 지적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의료기관들의 행정소송 제기 건수도 덩달아 늘어났다.

 

거물급 병원, 거물급 송사

 

주목할 점은 빅5와 같은 대형병원들의 적극적인 법정투쟁이다.

 

단순 삭감, 환수 등에 항거한 일반적 행정소송과는 달리 이들 대형병원은 굵직한 의료정책에 맞서 소송을 진행, 법정공방을 통한 의료정책 패러다임 변화에 주축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서울대학교병원이 진행했던 원외처방약제비 소송이 꼽힌다. 억울한 삭감을 참다 못한 서울대병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심에서 서울대병원이 승소하자 세브란스병원, 고대병원, 길병원 등 40개 병원이 잇따라 원외처방약제비 법정투쟁에 동참했다.

 

원외처방약제비 소송은 대법원까지 가는 공방 끝에 ‘의학적 타당성이 인정된 원외처방도 위법이기 때문에 공단의 환수 처분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온 상태다.

 

대표적 국가 의료기관인 서울대학교병원이 정책에 맞섰지만 법봉은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여의도성모병원의 임의비급여 소송 역시 의료계에 적잖은 파장을 던졌다. 원외처방과 함께 임의비급여는 임상 현장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졌던 관행이었다.

 

하지만 시민단체를 위시한 환자들이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지면서 수 년에 걸친 지루한 법정공방이 계속됐다. 사안의 상징성이 컸던 만큼 의료계 전체가 이 소송의 진행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임의비급여 소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일단락 됐다. 원천적으로 불인정 하되 의학적 타당성이 인정된 5가지 경우에 한해 인정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세브란스병원도 인공와우이식술과 관련된 심평원의 삭감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 승소 판결을 이끌어 내며 패러다임 변화에 일조했다.

 

법봉의 영향력

의료계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도 법봉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기폭제가 된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이다.

 

2009년 5월 김 할머니 가족들은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할머니의 평소 뜻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지만 세브란스병원 측은 현행법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결국 환자 측은 소송을 진행했고 2009년 대법원은 가족의 손을 들어주면서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도록 했다. 당시 대법원은 판결을 내리면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법제화를 권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2010년 본인의 연명치료 중단 의사를 존중하는 1차 합의안을 도출했다. 올해는 가족들의 대리 결정권을 인정하는 2차 권고안을 마련, 법제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CT, MRI, PET 등 환자들에게도 익숙한 영상장비 수가 인하 소송 역시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보건복지부가 이들 영상장비의 수가를 일괄 인하하자 병원들이 반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복지부의 행정절차상 오류를 지적하며 병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복지부는 이듬해 영상장비 수가 재인하를 추진, 결국 목표했던 바를 실현시켰다. 병원들의 승소는 1년 유예 효과에 불과했다.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의료법윤리학과 김소윤 교수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할 때 정당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없다면 송사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며 “정당한 행정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입증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부의 행정행위 의사결정 과정에서 당사자 입장에 대한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는지도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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