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이슬비 기자] 내년부터 근무환경 때문에 자녀가 선천성질환을 갖고 태어나면 태아도 산재 처리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가운데, 병원계에서 생식독성물질 관리 강화 및 근로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이른바 ‘태아산재법’이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금년 1월 11일 공포됐기 때문이다.
이 법은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의 업무상 사고·유해인자 노출로 인한 태아 건강손상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태아에게 요양·장해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골자로 한다.
내년 1월 시행 전까지 1년의 유예기간을 거칠 예정이며 공포일 이전에 산재 신청을 했다면 소급 적용을 받을 수 있다.
병원계 태아산재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09년 제주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에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15명 중 5명이 유산하고,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출산했다. 이후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역학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역학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주된 유해요인은 의약품 등 화학물질 노출, 환자 폭언·성희롱으로 인한 스트레스, 인력 부족·교대근무로 인한 육체적 부담 등인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제주의료원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수는 40명~60명 수준이었다. 간호사들은 오물처리, 욕창환자 드레싱, 용품 소독, 사망환자 처리 보조, 타병원 전원 행정업무까지 수행했다.
특히 당사자들이 생식계에 장애를 유발하는 생식독성 물질을 상시 다룬 것으로 확인됐는데, 여기에 미국식품의약국(FDA)가 임산부와 태아에 유해하다고 규정했던 카테고리 D·X 약물들이 포함된 것이다.
장기입원 고령환자들이 주로 복용하는 ‘아시트과립’·‘달마돔정’·‘프로스카정’·‘자나팜정’·‘코다론정’·‘아테놀정’ 등이 그 예다.
이곳 간호사들은 취급 주의사항에 대한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채 환기시설이 없는 곳에서 보호장구 없이 매일 200여정의 약을 분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이 확인돼 당사자들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제주지사에 요양급여를 청구했지만 부지급 처분을 받았다. 이후 긴 법정 다툼이 이어져오다 지난 2020년 4월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태아산재를 인정했다.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당시 산재법으로는 태아가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아 근로자 당사자만 보험급여를 수급할 수 있었다.
“생식독성물질 취급 환경관리 교육 및 강화하고 남성 노동자도 포함” 주장
이번 개정안으로 인해 태아에게도 급여가 주어지게 됐지만 아직까지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해당 법 제정에 앞장섰던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본부장 이향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장철민·강은미 의원, 반노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이 최근 개최한 ‘태아산재법 제정 의미와 과제’ 토론회에서 이 같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향춘 의료연대본부장은 “국내 작업장 취급 화학물질은 약 4만종인데 산업안전보건법 노출기준을 제정하고 있는 물질은 700여 종에 불과하고 특히 생식독성물질은 44종에 불과하다”며 “취급 실태·노출수준 평가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조승규 반도체노동자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상임활동가는 “남성 노동자의 유해요인 노출로 인한 태아산재 제보를 받고 산재신청을 진행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어 “또 산재보험법상 급여내용 중 제외된 휴업급여·유족급여·상병보상연금이 제외됐는데, 태아는 언제까지나 태아가 아니다”면서 법 개정을 촉구했다.
법 재정비 뿐 아니라 병원들 내 근본적인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언제라도 제주의료원과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에 모니터링을 철저히 하고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향춘 본부장은 “병원 근로자의 임신기간 중 노동 강도 및 유해물질 등을 파악해야 한다”며 “장비와 기계기구를 개선하고 약제 취급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보호구 등을 필수로 지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