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과 의사들 합종연횡…병원 경영진 고민 가중
고액 연봉은 기본에 근무형태·시간 등 다양한 조건 요구 일반화
2024.05.30 05:33 댓글쓰기

[편집자주] 병원계 의사 인력난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진료과 의사들의 합종연횡에 경영진의 시름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소속 병원을 넘어 타 병원 의사들과 근로조건 등을 공유하며 경영진을 향한 요구사항이 늘어나는 만큼 경영진 부담도 커지는 모양새다. 특히 연봉에 초점이 맞춰졌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근무형태, 근무시간 등 다양한 형태에서 요구가 이뤄지고 있다. 가령 영상의학과 의사들의 경우 주, 월 단위 판독건수에 제한을 둔다거나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들은 마취건수에 제동을 걸어 병원장들이 운영에 어려움이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날로 치솟는 인건비, 운영비에 의료진의 잇단 요구사항까지 병원장들의 그 먹먹한 현실을 조명한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두려운 원장들

“갑작스런 상담 신청에 가슴이 철렁철렁합니다. 연봉은 기본이고 근무형태나 조건 등 요구사항이 상당히 구체적이에요. 갈수록 병원 운영이 힘겹습니다.”

중소병원 원장들의 한 숨이 늘고 있다. 예년과 달라진 봉직의사들 행보에 가슴을 치는 일이 잦아지는 모습이다.

당장 의사 한 명이 아쉬운 채용난을 감안하면 이들의 요구를 대놓고 거절만 할 수 없고, 수용하자니 다른 의료진과의 형평성 등 걸리는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닌 상황이다.

특히 연봉 관련 요구 일색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진료과별로 세부적인 근무조건을 제시하는 경향이 늘고 있어 경영진을 더욱 당혹케 하고 있다.

그나마 내시경 검사, 척추·관절 등 수술이나 시술 위주의 진료과들은 일찍이 매출에 비례하는 급여나 인센티브 형태가 자리잡은 탓에 잡음이 덜하다.

하지만 영상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 재활의학과 등에서 근무조건 개선 요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병원장들은 입을 모은다.

그동안 통상적이었던 판독과 마취 업무량을 줄여달라거나 인력구조상 수용이 어렵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달라는식이다.

특히 재활의료기관 제도 도입 이후 법정 인력기준 충족을 위한 병원들 수요가 급증한 재활의학과의 경우 요구사항은 더 파격적이고 더 다양하다.

병원장들은 이러한 현상이 동일 진료과 의사들의 왕성한 정보교류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아예 일부 학회나 의사회는 근무형태와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기도 한다.

동일 진료과 의사들 교류가 비단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온라인이나 SNS를 통한 소통창구가 다양해지면서 훨씬 세부적인 내용까지 공유하는 추세다.

여기에 사회적인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풍토까지 자리잡으면서 연봉을 넘어 근무조건까지 평준화 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중소병원 원장은 “다른 병원들과 비교하며 근무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탓에 어려움이 크다”며 “앞으로 이러한 현상이 더욱 확산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봉 아니다”…달라진 봉직의들 분위기

“전국 봉직의들은 소속 병원에 일제히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 결의로 인해 외부로부터 어떠한 불이익이라도 발생할 경우 끝까지 대항해 투쟁할 것이다.”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으로 촉발된 의료계 총파업이 절정에 달했던 2000년 6월 20일 전국병원의사협의회가 탄생했다.

‘경영난’이라는 미명 하에 임금을 동결, 삭감당하고 있고, 양심적이고 교과서적인 진료가 불가능한 상황에 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봉직의 상황에도 많은 변화가 일었다. 각종 제도와 급격한 병원환경 변화에 봉직의들 위상이 달라졌다.

의료 질 제고를 위한 의사 인력기준이 강화됐고, 의료계에도 규모의 경제 열풍이 불면서 봉직의 수요가 폭증했다.

물론 전문과목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봉직의들 몸값은 치솟았고, 근무지 선택의 폭도 크게 늘어나는 등 그야말로 귀하신 몸이 됐다.

23년째 봉직의로 재직 중인 한 중소병원 부원장은 “말 그대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속에 봉직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절감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과거는 열악한 임금이나 과도한 업무, 병원의 매출 지향적인 진료 강요 등이 고민의 공통분모였다면 최근에는 워라벨 실현 여부가 최대 관심사”라고 덧붙였다.

다만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 재직 중인 봉직의들의 경우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전히 고강도 근무를 수행 중이다.

이에 병원 봉직의 대표 모임인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정부와 국회에 중환자 안전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협의회는 △중환자실 등에 적정 전문의 확보 병원만 해당 진료 허용 △각 전문의 근무시간은 온콜 포함 최장 주 52시간 초과 금지 △한의사 당직 허용 규정 철폐 등을 요구했다.

말 보다 글…근로계약서 활용

전문가들은 병원과 봉직의 모두 달라진 상황을 직시함과 동시에 불필요한 갈등과 분쟁을 최소화 하기 위해 근로계약서를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두상 협의된 계약은 도중에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만큼 병원과 봉직의 모두 근로계약서에 급여는 물론 근로형태, 근무조건 등을 상세하게 적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지인이거나 추천으로 함께하는 경우나 원무팀이나 인사팀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병원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적잖은 만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가령 근무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는데 병원이 바빠지면서 진료시간을 30분 늘린 경우 병원은 양해를 구한 것으로, 봉직의는 추가 수당을 줄 것으로 달리 생각할 공산이크다.

이 외에도 학회와 외부 행사 참석 여부를 놓고도 입장과 해석이 달라 결국 갈등을 빚다가 퇴사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때문에 병원이나 봉직의 모두 당혹스러운 상황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근로계약서를 통해 처음부터 불필요한 갈등 요소를 제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봉직의 입장에서는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병원 입장에서는 갑작스런 근무조건이나 근무형태 변경 요청을 받고 고심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근로계약서에는 근로기간, 근무장소, 근무시간, 업무내용, 휴가, 임금, 급여일, 복리후생(사택 제공 등) 등의 요건을 최대한 상세하게 기술해야 한다.

특히 가장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임금계약 방식은 물론 NET일 경우 퇴직금 포함 여부, 연말정산 방법 등을 상호 합의 하에 적시해야 한다.

한 종합병원 소속 노무사는 “어차피 병원과 봉직의는 노사관계인 만큼 꼼꼼한 근로계약서 작성을 통해 상호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계약서 갱신 시점에서 서로 조건이 맞지 않는 경우 채용에 어려움이 있는 병원이 불리할 수 밖에 없다”며 “시대적 흐름은 감안해야 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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