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가슴 저미는 처참한 6.25 전쟁史
인민군 자행 대학살 현장, 환자·의료인·군인 등 1000여명 희생
2019.06.24 12:13 댓글쓰기
[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 ! !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이 병원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내 병상 위 뽀얀 침대보는 검붉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 북한군 병사들은 모든 병실을 돌며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채 겁에 질린 상태로 삶의 최후를 맞아야 했다. 1950628일 벌어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은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가슴 아픈 한국전쟁사로 기록돼 있다. 데일리메디는 625 전쟁 기념일을 앞두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는 마음으로 대한민국 의료사에 가장 참혹했던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을 조명했다.
<사진출처 국방부> 
1950625일 일요일 새벽 4. 기갑전력을 선봉에 세운 북한군이 서울로 향했다. 하루 만에 의정부가 함락됐고, 27일에는 국군 방어선이 미아리까지 밀려 내려왔다.
 
혈전을 치루며 속출한 국군 부상병들은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침상이 부족해 상당수는 병원 복도에서 피 묻은 군복을 입은 상태로 고통을 호소했다.
 
민간인 환자와 보호자, 부상병 등이 뒤섞인 병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전선이 밀리며 상황이 급박해지자 서울대병원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제네바 협약에 기대를 걸며 병원 옥상에 적십자 마크를 그리고, 국기 게양대에도 적십자기를 달기로 했다.
 
그러나 부상자, 병자, 포로 등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한 협약이었지만 북한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전쟁 3일째인 628일 미아리-회기동 일대의 국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서울이 함락되면서 서울대병원에도 북한군이 들이닥쳤다.
 
병원을 지키던 국군 경비 병력 1개 소대와 움직일 수 있었던 부상병 80여 명이 뒷산에서 끝까지 응전했지만 전멸했다.
 
병원에 난입한 북한군 병사들은 각 병실을 돌며 침상에 누워 있던 부상병과 민간인 환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오후까지 계속된 학살에서 살아남았다가 걸린 이들은 보일러실로 끌려가 석탄 더미에 생매장 됐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만 무려 1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의 사체는 학살이 자행된지 20일이 지난 후에야 창경궁 인근에서 소각됐다. 당시 병원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특히 학상 당시 수 많은 군의관과 간호사 등이 강제로 북송됐다.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도 이 때 북한군에 의한 납북됐다.
 
북한군의 병원 학살은 서울대병원뿐만 아니라 적십자병원 같은 서울 소재 병원들은 물론 지방 다수의 병원에서도 자행됐다.
 
서울대병원 학살이 알려진 것은 9월 무렵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된 후였다. 하지만 상당수 희생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고, 그렇게 비극의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1963년 희생자들이 묻힌 자리에 한 언론사가 이름 모를 자유 전사의 비라는 현충탑을 세워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렸다.
 
서울대병원은 매년 628일을 전후해 이 현충탑에서 추모제를 지낸다. 올해도 그날의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가 예정돼 있다.
 
이 현충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 있다.
 
“19506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는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돼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 속에서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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