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관 내 CCTV 운영에 대한 논의가 의료인에서 환자 중심으로 무게추를 옮겨가고 있다.
故 신해철 씨 사망 이후 환자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며 이러한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는 모양새다.
그동안 의료기관 내 CCTV 설치 논의는 의료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의료기관 내 CCTV를 설치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방범용이거나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상호 간 발생할 수 있는 폭력적인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의료기관에서 환자가 저지른 폭력 현장을 고스란히 담은 CCTV 영상은 의료인 안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2013년 경기도 모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환자가 의자로 의사 얼굴을 때리고 집기를 던지며 난동을 부리는 CCTV 녹화 영상이 SNS를 통해 퍼지면서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고, 비슷한 시기 진료실에서 환자가 의사에게 칼부림한 영상이 공개되며 사안의 심각성을 전했다.
당시 연일 계속되는 의료인 폭행사건에 분노한 의료계는 의사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 마련에 고심했고, 당시 거론된 방법 역시 진료실 CCTV 설치였다.
노환규 당시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료인 폭행 방지를 위한 의료법 개정 및 진료실 CCTV 설치 허용을 추진 등 진료실 폭력으로부터 의료인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 마련에 본격 착수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물결 속에서 CCTV 설치로 인한 환자나 보호자 등의 기본권 침해 문제는 지속적으로 지적됐지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2013년 안전행정부가 시행한 의료기관 개인정보보호 실태점검에서 점검대상 34개 중 22개 의료기관이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 이 중 진료실, 탈의실 내부에 CCTV를 설치해 운영한 사례가 적발됐지만 침해받은 환자의 권리보다는 의료기관의 미숙한 CCTV 운영에 초점이 맞춰졌다.
의료인 중심의 논의 흐름이 환자 쪽으로 급변한 것은 신해철 씨 사망 사건 이후다.
물론 환자단체, 시민소비자단체 등에서 10여 년 전부터 수술실 CCTV 설치를 주장했지만 여론의 탄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신해철 씨 사망 후 의료분쟁에 있어 환자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고, 전문가들로부터 수술실 내 CCTV 설치 필요성이 심심찮게 거론됐다.
이러한 의견이 반영돼 신해철 씨 팬클럽 ‘철기군’은 수술실 CCTV 설치와 보관 의무화 등을 법제화하기 위한 10만인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중이다.
의료분쟁 발생 시 의료지식의 비대칭성으로 환자가 의료행위의 적절성을 가리기 어렵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모니터링 할 수 있도록 CCTV 등을 통해 ‘결정적 증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7일 새정치민주연합 최동익 의원이 발의한 일명 'CCTV법(의료법 개정안)'은 환자 중심의 CCTV 운영 논의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 법에는 의료사고 발생 위험이 큰 의료행위를 할 경우 모든 의료기관은 환자 측의 동의를 얻은 후 해당 의료행위를 하는 장면을 CCTV 등으로 촬영해야 하고, 환자 측의 촬영 요청이 있는 경우, 의료기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료분쟁에서 환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수술실 CCTV 설치를 법제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료계 “결국엔 환자 손해” vs 소비자단체 “환자 알권리 확보 상징적 의미”
이 같은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의사협회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의료행위를 잠재적 범죄로 간주, 환자와의 신뢰관계 형성이 어렵고 진료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 결국 적극적인 의료행위를 방해해서 환자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현영 의협 홍보이사 겸 대변인은 "수술실 CCTV 설치는 의사들의 소신진료를 방해할 것“이라며 “수술 장면을 영상으로 모니터링 하면 의사는 환자를 위한 최적의 의료행위를 하기보다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원칙에 근거한 소극적인 진료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의사들의 방어진료는 결국 환자에게 손해다. 일부 의사들이 만든 논란에 대해 의협이 자율자정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를 법적 규제로 연결시키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견해도 내놨다.
강청희 의협 상근부회장 역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수술실 CCTV 설치가 의료분쟁에 있어 제한된 정보만 제공,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촬영 영상의 유츨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강 상근부회장은 "현재 논의가 대리수술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성형외과에만 집중돼 있는 경향이 있다. 사실 수술실 CCTV로는 수술 과정을 담을 수 없어 제공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다. 의료행위 적절성 등을 알기 위해서는 의무기록을 봐야한다"며 "법안에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유출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그는 "CCTV 촬영 영상에 대한 유출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실제 정보가 유출돼 논란이 빚어졌던 일도 있다"며 "그럼에도 환자들이 촬영을 원할지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그는 법안을 발의한 최동익 의원에게도 "의료계를 옥죄는 법안을 양산하고 있다. 이들 법안을 마련하는데 의료계와 상의 없이 입안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며 "환자단체만 대변하는 것은 공정해야 하는 입법 정신에 위배된다" 강조했다.
환자단체와 시민소비자단체는 지금의 기류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본회의 통과까지는 고행이 예상되지만 발의 자체만으로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반응이다.
강태언 의료소비자연대 사무총장은 “환자의 알권리 보장과 안전 확보 등을 위해 필요한 법안”이라며 “영국의 경우 블랙박스, 미국 트라우마센터는 베드에 눕는 순간부터 촬영과 녹음이 시작된다”고 소개했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이 같은 주장을 했던 단체로서 수술실뿐만 아니라 신생아실이나 중환자실 등 환자가 자기 의사 표시할 수 없거나 의식 불명인 곳에 CCTV나 블랙박스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설치 구역 확대를 촉구했다.
강 사무총장은 “의사들은 수술실 CCTV 설치가 의권을 약화시킬 것이라 여기는데, 이는 시각의 차이다. 또한 의사의 의권이 환자의 생명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