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하던 전공의들의 당직비 집단소송 움직임이 현실화 되면서 병원계가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건양대병원 ‘인턴 당직비 미지급 손해배상 소송’이 2심에서 승소를 거둠에 따라 전공의들이 잇따라 수련병원 대상으로 소송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수련환경 개선이 시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전공의들은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근로시간을 초과해 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전공의들은 소송을 통해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수련환경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다짐으로 추가 근로수당 소송 준비를 본격화하고 있다.
“근로자 지위 인정·포괄임금계약 무효”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번 건양대병원 소송 1심, 2심 재판부 모두 전공의와 관련해 피교육자와 더불어 노동력을 제공하는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전공의들이 과도한 업무시간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인 근무시간에 상응하는 임금지불을 요구하지 못했던 까닭은 근로자보다는 피교육자로서의 위치에 방점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주당 100시간이 넘어가는 근무시간은 의사가 되기 위해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이라는 수련시절 참아야 하는 관례로 여겨져 왔다.
수련병원들 역시 피교육자로서 전공의 신분을 강조하며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저임금으로 전공의들을 고용해왔다.
반편 법원은 그 동안 당연하게 여겨진 전공의의 야간 및 휴일 근무는 병원의 인력 운용 편의와 재정 부담 경감 차원에서 실시된 관행일 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전공의들이 피교육자적인 지위를 갖고 있고 수련병원들이 교육 및 수련으로 인해 상당한 액수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음은 인정되나 이는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전공의들의 근로 제공 및 과소한 급여 지급으로 보전할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선언했다.
전공의의 근로자 신분 이외에도 재판부는 병원 측이 주장했던 포괄임금계약은 전공의가 합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포괄임금은 근로기준법 상 각종 수당 등을 포함한 금액을 월 급여로 지급하는 것으로, 수련병원 측은 전공의와의 포괄임금약정이 존재하므로 손해 배상 청구가 부당하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재판부는 “전공의들이 아무런 이의 없이 수련병원이 정한 급여를 수령해 온 사실만으로 전공의들이 포괄임금제를 수용 또는 합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결문에 명시했다.
피교육자적인 지위를 겸하는 전공의 입장에서는 급여지급 기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는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이번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던 나지수 변호사는 “추가근로소송은 기본적으로 노동사건”이라며 “1심 2년, 2심 1년 등 승소가 확정되기까지 총 3년이 걸렸다”고 전했다.
나 변호사는 “대부분 수련병원이 비슷한 상황이다보니 법원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며 “대법원까지 재판이 진행돼 판례를 남기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일단은 선례가 생긴 것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대전협, 소송 전폭적 지원
또 한 가지 건양대병원 승소 이후 바뀐 점은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가 전공의들이 소송에 참여하도록 전폭적인 지원에 나선 것이다.
대전협이 직접 소송의 주최가 돼 1만7000명의 전공의들을 대신해 집단소송을 제기하려고도 했지만 집단소송의 경우 소비자 및 환경단체에 국한되는 법률적인 제약으로 추진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대전협은 전공의 개인이 직접 소송을 제기하되 다수가 함께 공동으로 소를 제기하는 방안을 지원하고 있으며 단순 법률정보 제공만이 아닌 실질적인 소송 준비를 함께 하고 있다.
그 첫걸음으로 대전협은 전공의 추가근로소송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소송을 위한 자료마련 방안 등을 공지했다.
또한 소송에 관심이 있는 전공의들이 온라인에서 소송인단을 모집할 수 있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도 개발하며 전공의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실체적인 소송준비를 위해 어플리케이션 코너 중 하나로 ‘추가 근로수당 소송인단 모집’을 개설하고 소송에 관심이 있는 전공의들 간의 정보교류를 가능하도록 했다.
어플리케이션에 접속한 전공의들은 수련병원별 게시판을 통해 공동소송을 함께 할 사람의 이메일 등 연락처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초과 근로수당 정보공유’ 게시판에서도 전공의들이 다른 소송인단과 정보를 공유하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도록 한다는게 대전협의 지원 방향이다.
이와 더불어 대전협은 최근에는 정기대의원총회 자리를 빌려 건양대병원 소송을 승소로 이끈 나지수 변호사를 초청해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추가근로수당소송 설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설명회에서는 소송을 제기하고자 하는 전공의들이 준비해야 할 자료와 소송에 고용할 변호사 비용 등에 대한 상담까지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또한 설명회 이후에도 대전협은 소송에 관심이 있는 전공의들에게 로펌과 변호사를 연결시켜주는 창구 역할을 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이미 법률사무소 570여 곳을 대상으로 전공의 추가근로수당 소송의 안내와 제안서 수집 공문을 보냈으며 이 중에서는 통상적으로 소송에 들어갈 때 변호사에게 내야하는 착수금을 제외해 주는 제안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련환경 개선 위한 압박수단
이 같이 대전협이 전폭적으로 전공의들의 추가근로소송을 지원하게 된 배경은 비단 노동에 대한 대가를 금전적으로 보상받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 추진 중이지만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받고 있는 주당 80시간 수련시간 제한 등을 담은 수련환경 개선안의 이행을 병원에 촉구하는 방안으로도 소송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실제 소송이 확대될 경우 경제적 비용만 따져보더라도 수련병원들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대한병원협회(이하 병협)가 추산한 전공의 수련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할 경우 전체 수련병원의 추가 인건비는 300~4000억원이다.
소송의 경우 주당 근무시간 40시간 기준 및 미지급된 기간의 이자 등을 고려하면 비용은 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실제 건양대병원 소송의 원고 인턴 1명에게 돌아간 금액은 10개월 동안 지급하지 않은 시간외 수당은 3344만원으로 이자까지 합산하면 4500만원가량이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까지 추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안으로는 S 대학병원 소속 전공의 90여명이 참여하는 공동소송을 비롯해 국립대병원 등 3~4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번 소송에는 빅5 병원 중 한 곳도 속해 있다는 것이 대전협의 설명이다.
대전협 송명제 회장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전공의들이 근로자로서 누려야 한다는 것도 소송의 목적이지만 실질적인 수련환경 개선에 꿈쩍하지 않는 수련병원들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도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