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下]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부정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 한 달을 맞았다. 청탁금지법은 의료계와 밀접한 관련 있는 제약 및 의료기기 산업, 학회 등에도 전대미문의 굵직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문의약품 주력 제약사 ‘예민’...중소업체는 ‘담담’
“차이가 크다.” 청탁금지법을 두고 A제약사 관계자는 "기존 홍보 활동 대부분이 크게 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 시행 이후 언론사 및 의료기관 관계자들과의 저녁 식사는 거의 없는 편"이라며 “점심도 자제하는 실정”이라고 언급했다.
청탁금지법은 법 적용 대상자뿐만 아니라 접대 주체인 기업들에도 민감한 사안이다.
자사 의약품 처방을 위해 잦은 의료기관 출입을 하는 제약사 영업사원과 언론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홍보팀의 업무 활동이 청탁금지법과 함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는 것이 업계 반응이다.
경직된 영업 및 홍보활동은 일반의약품보다는 전문의약품을 주력으로 하는 상위권 제약사에서 두드러졌다.
전문의약품을 주로 다루는 B제약사 관계자는 “개인적으로 법 시행 이후 업무 과정상 번거로움이 더해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활동 하나하나 확인을 하고 진행해야 해서 불편함이 있다”며 “대화를 할 때도 깊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C제약사 관계자도 “아무래도 업무 성격이 청탁금지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부분이 있어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청탁금지법 적용 범위에 직접적으로 포함되는 대학병원들은 기존 약사법보다 한층 강화된 ‘김영란법’으로 인해 영업사원 출입금지령까지 내린 곳도 있다.
한 제약회사 영업사원은 “많지는 않지만 대학병원에서 영업사원 출입을 꺼리는 분위기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반면 일반의약품을 주력으로 하거나 중소 규모 제약사들의 청탁금지법 체감도는 낮았다.
D중소제약사 관계자는 “기존에도 크게 대외적인 홍보활동이 많지 않아 체감하는 바는 낮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E중소제약사 역시 “기존에도 사내에 큰 이슈가 없었던 터라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제약사들은 청탁금지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변호사 및 외부기관을 통해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지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의료기기 업계 “민원인 만나기를 꺼려해요”
의료기기 업계도 청탁금지법 시행과 함께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A의료기기업체 관계자는 “기존에도 리베이트 쌍벌제가 있어 청탁이 쉽지는 않았지만 김영란법 시행으로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복지부나 심평원과 접촉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민원인을 만나는 것을 꺼리고 있어 난감할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
의료기기 업계는 의약품과 의료기기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한 자와 수수한 자 모두 처벌하는 리베이트 쌍벌제 테두리 안에 있다.
이로 인해 기존 리베이트 쌍벌제 위반을 하지 않기 위해 변화를 준 영업 및 홍보활동 지침을 또다시 개정해야 한다는 우려도 나왔다.
B의료기기업체 관계자는 “청탁금지법으로 인해 기존 제품보다 후발 제품의 홍보가 위축될 수 있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이로 인해 신제품보다는 충분한 홍보로 인지도가 있는 기존 제품 선호도가 더 높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전했다.
반면 다국적 의료기기업체는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오히려 "편해졌다"는 것이 업계 고위 관계자의 전언이다.
고도의 기술력 없이 낮은 가격과 리베이트로 제품 랜딩을 시도하는 국내 영세 의료기기업체들을 더는 견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 다국적 의료기기업체 관계자는 “대관 업무 등 별다른 영향은 없는 상태”라며 “다만 3만 원 식사 기준에 맞추다 보니 회의 등이 보통 한 시간 내외면 끝났다는 게 차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다국적 의료기기업체 관계자 또한 “기존 본사 윤리강령이 청탁금지법보다 엄격했기 때문에 업무 방식에 있어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고 전했다.
동시에 청탁금지법 내에 현재까지 명문화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지 않아 법 시행 초반 우려됐던 ‘혼란’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반응이 다수였다.
실제 청탁금지법 시행에 따른 혼란이 지속되자 정부는 최근 ‘관계부처 합동 법령해석 지원 태스크포스’ 운영을 밝힌 바 있다.
이를 통해 일선 현장에서 혼란을 가중하는 법령 해석 문제에 우선 대응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C의료기기업체 관계자는 “식사 기준에 맞춰 무조건 3만 원 이하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가성’이 확인되면 식사 자체가 청탁이 된다는 것을 최근 알았다.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솔직히 혼란스럽다”고 털어놨다.
D의료기기업체 관계자 또한 “아직 시행되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점도 있겠지만 여전히 유권해석이 오락가락하는 등 헷갈리는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사라진 ‘기자간담회’...변화한 학회 풍경
‘가을’ 학회 시즌이다. 추계학술대회 일정으로 바쁜 가운데 올해 의료계 관련 학회는 예년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인 지난 13일 개최된 대한당뇨병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기자도 취재 등 학회 참여를 위해 등록비 5만 원을 내야 했다.
또한 명찰 없이는 학회장 입장도 어려웠을뿐더러 초록집도 명찰 없이는 받을 수 없었다.
학술대회 내내 빈번하게 열렸던 기자간담회도 이번 추계학술대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열렸던 대한응급의학회, 대한비뇨기과학회, 대한피부과학회 등도 모두 기자간담회 일정을 따로 갖지 않았다.
한 학회 홍보이사는 “올해 기자간담회 일정은 청탁금지법 시행 등으로 예민해져 따로 잡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올해는 대관, 연차초청 등에 들어가는 예산을 작년에 이미 정해둬 무사히 학회를 운영할 수 있었지만 내년은 어떨지 걱정이 된다”고 토로했다.
다만 제9차 아시아·태평양 부정맥학회 학술대회와 류마티스학회는 기자간담회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학회 내 오랜 전통처럼 여겨졌던 런천심포지엄도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부터는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
청탁금지법이 정한 ‘식사 3만 원’ 기준을 준수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
현재 부정청탁금지법 제8조 제2호에서는 가액범위에 해당하는 3만 원의 식사 이하라도 직무 관련성을 띤 음식물과 선물을 수수하는 경우 제한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도 “점심의 경우 가액기준인 3만 원을 넘는 경우가 많아 따로 런천심포지엄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제약사와 학회 양측 모두 청탁금지법으로 기존 관행처럼 여겨졌던 행동들이 모두 법 기준을 넘어서자 몸을 사리고 있다.
일부 학회에서는 내년 춘계학술대회부터는 프레스룸 설치를 고려하는 등 새로운 방법을 숙고하고 있다.
한 의료계 인사는 이 같은 풍경을 두고 “청탁금지법의 본래 취지는 굉장히 동감하지만 다소 삭막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 같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