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기간 누적된 경고와 우려에도 별다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진 분만 인프라와 관련해 산부인과 의사들이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제는 아무리 많은 재정을 쏟아 부어도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파격적인 정책 시스템 전환을 통한 재건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대한산부인과학회(이사장 이재관)는 9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내 분만 인프라 붕괴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에 종합 정책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전국 250개 시‧군‧구 중 분만 의료기관 없는 ‘지역 40%’
우선 학회는 구체적인 수치를 통해 분만의료 붕괴 심각성을 전했다.
학회에 따르면 분만이 가능한 의료기관은 2003년 1371개에서 2025년 400개로 무려 71%나 급감했다. 이로인해 전국 250개 시‧군‧구 중 분만 의료기관이 없는 지역이 40%에 달한다.
분만을 담당하는 의사도 급격하게 줄고 있다. 전국에 산부인과 전문의가 6000명 정도 있지만 이들 중 8~15%만 분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학회는 추산했다.
더욱이 산모 고령화에 따른 고위험 분만이 늘고 있지만 이를 담당하는 의사는 전체 분만 의사의 10~20%에 불과한 실정이다.
산부인과 의사들의 이러한 분만 기피현상은 수 십억원에 달하는 의료사고 배상금 등 소송 부담과 함께 저수가, 24시간 응급대기 등이 꼽힌다.
저출산 영향으로 분만 건수가 줄어들고, 그나마 있는 분만도 고위험 사례가 늘어 수익이 악화된 의료기관들 분만을 포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정부에 ‘분만의료 준공영제’ 도입을 제안했다.
준공영제(准公營制)는 민영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공영제에 준할 만큼 관에서 맡는 비중을 고도화한 제도로, 지난 2004년 서울시가 시내버스 개편을 하면서 처음 도입된 제도다.
이를 확장시켜 버스영업을 전체적으로 관에서 맡게 되면 공영제가 되며, 반대 개념은 버스영업 전체에 관이 개입하지 않는 완전한 민영제다.
버스 노선 설정권은 시가 갖고 버스회사는 여기에 맞춰 운영하되, 수익금은 운행 실적에 따라 배분 받고 적자분은 시에서 보조해 주는 방식이다.
학회는 분만의료에도 이같은 준공영제를 도입함으로써, 의료기관들이 적자 고민에 분만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상훈 사무총장은 “준공영제 도입을 통해 분만 건수와 상관없이 의료기관의 고정비를 보전하고, 손실분은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천편일률적 포괄수가 대수술 절실하고 학회‧개원가 단일대오로 위기 상황 극복 최선"
포괄수가로 묶여 있는 분만수가의 대대적 개편 필요성도 주장했다.
고위험, 응급상황, 예측 불가 상황 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모든 분만에 대해 동일한 수가를 적용하는 현 구조를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자연분만의 경우 △고령산모(35~39세, 40세 이상) △다태임신 △조기진통 △내반복 분만 등 고위험도별 수가를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제왕절개 역시 △일반 제왕절개 △응급 제왕절개 △전치태반 △태반 조기 박리 △유도분만 실패 후 전환 △고령산모 제왕절개 등으로 포괄수가를 세분화 하자는 제언이다.
여기에 △응급도 △병원 기능 조정계수 △지역 조정계수를 반영한 가산과 함께 분만 마취 및 야간‧휴일 분만 가산 신설도 제안했다.
이재관 이사장은 “분만의료 붕괴는 국가적 위기”라며 “고위험 분만 수가의 대대적 인상, 의료사고 발생 시 국가 책임 보상 한도 상향 등의 조치가 절실하다”고 피력했다.
학회는 이러한 절박함을 알리고 정부의 전향적 정책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산부인과 개원가 단체와 함께 전국 주요 권역을 순회하며 대규모 포럼을 계획 중이다.
오는 4월 영남권을 시작으로 6월 수도권, 7월 호남권에서 개최될 정책 포럼에서는 분만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산부인과 의사들의 절규가 이어질 전망이다.
실제 전국 순회 포럼은 대한산부인과학회를 비롯해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직선제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 대한분만병의원협회 등 5개 단체가 함께 한다.
이재관 이사장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만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개탄스럽다”며 “분만 인프라 붕괴가 더 이상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어 “분만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산부인과 필수의료 지속 가능성 확보를 위한 해법을 찾아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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