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이었다. 정년퇴임 교수들의 통상적인 ‘인생 2막 설계’와는 결이 달랐다. 국내 종양학 최고 석학의 선택지는 진료현장이 아닌 산업현장이었다. 의료계는 물론 산업계도 술렁이게 만들기 충분한 파격 행보였다. 물론 임상의사들의 산업계 진출이 생소한 상황도 아니고 바이오벤처 CEO를 맡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국내 제약산업 1위 기업, 그것도 ‘사장’이라는 최고 책임자로의 이직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김열홍 유한양행 R&D 총괄 사장은 “35년 세월 암환자 진료와 연구에 몰두한 경험을 토대로 조금은 다른 영역에서 암(癌) 정복의 꿈을 이어가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진료실을 떠나 경영자의 길로 접어든지 1년을 넘긴 그는 ‘개별 환자’가 아닌 ‘인류 건강’을 논할 정도로 시야와 사고(思考) 폭이 확장돼 있었다.
암 환자 진료는 ‘1명’ 항암 신약은 ‘전(全) 인류’
30년 넘는 세월 진료실과 연구실에서 암환자와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김열홍 사장은 국내 최고의 암(癌) 권위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보건복지부 지정 폐암‧유방암‧난소암 유전체연구센터 소장, 한국유전체학회 회장, 대한암학회 이사장, 아시아암학회 회장 등 그의 수려한 이력은 나열이 어려울 정도다.
특히 고려대학교 K-MASTER 사업단장으로 암 진단‧치료법 개발 프로젝트를 이끌며 정밀의료 관련 데이터 및 노하우를 구축했다.
지난해 정년 이후의 삶을 놓고 천착을 거듭하던 그는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에서 암(癌) 정복에 대한 열정의 연장선을 긋기로 했다.
그동안 진료실에서 암환자를 개별적으로 치료해온 만큼 앞으로는 보다 많은 암환자에게 치료의 희망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진료실에서는 오롯이 환자 1명의 치료에만 집중해야 하지만 ‘신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다 많은 환자들에게 치료기회를 선사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물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도 존재했다. ‘학교와 병원’이라는 울타리에서 지내온 의대교수에게 경험해 보지 않은 산업현장은 그야말로 ‘전장(戰場)’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기꺼이 감내하기로 했다. 좋은 약물을 발굴 또는 개발해 암 치료율 향상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로 과감히 산업현장에 투신했다.
우려가 기대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서 ‘1인 경영자’로 통하는 교수 출신답게 빠른 의사결정으로 조직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뿐만 아니라 신규 환자에게 빠른 진단과 검사를 통해 신속한 치료전략을 수립하던 습관이 조직에 자연스레 투영되면서 위기 대처 능력이 배가됐다.
김열홍 사장은 “진료와 경영이 묘하게 닮은 부분이 많다”며 “정확한 진단과 객관적 분석, 효율적 결정은 환자나 조직에 공통으로 적용된다”고 설파했다.
“렉라자는 시작, 혁신 전략 기반 성과 지속 창출”
일찌감치 조직 적응을 마친 김열홍 사장은 본격적인 성과 창출에 나섰다. 가장 시급한 사안은 회사 숙원인 폐암 신약 ‘렉라자’의 제도권 진입이었다.
앞서 렉자자는 국산 신약 허가, 2차 치료제 허가 등 입지를 다져왔지만 ‘1차 치료제 승인’과 ‘급여권 진입’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열홍 사장은 항암제에 대한 급여 여부를 결정하는 암질환심의위원회에 렉라자의 비소세포폐암 1차 치료 급여를 인정받기 위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설득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해 식약처로부터 1차 치료제 사용 승인을 받았고, 다시 6개월만에 건강보험 급여 관문을 통과하며 올해 1월부터 1차 치료제로 급여가 확대됐다.
특히 렉라자는 급여 확대 성과와 함께 지난해 12월 정식허가로 전환되며 약 2년 10개월 만에 ‘조건부 허가’라는 한계도 말끔하게 털어냈다.
이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미국 FDA 허가다. 유한양행은 현재 FDA에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리브리반트와 렉라자의 병용요법에 대한 신약 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승인 결정 시점은 오는 8월이다. 미국 FDA 승인이 내려지면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도약할 수 있는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렉라자는 시작에 불과하다. 김열홍 사장은 유한양행의 R&D 총괄 책임자로서 제2, 제3의 렉라자 신화를 창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다만 후보물질 개발부터, 임상시험, 승인허가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전통적 방식에서 탈피해 과감한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 전략을 구사한다는 복안이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한편 내부 자원을 외부와 공유하면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혁신적 신약 개발 전략이다.
렉라자 역시 2015년 오스코텍의 미국 자회사 ‘제노스코’로부터 신약 후보물질인 ‘레이저티닙’을 15억원에 도입해 제품화에 성공한 오픈 이노베이션의 대표적 결과물이다.
김열홍 사장은 “혁신 기술과 신약 후보물질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며 “이를 발굴해 제품화 하는 것도 중요한 신약 개발 과정”이라고 피력했다.
젊은의사들 인식 전환해서 많은 사람들 산업계 진출 희망
국내 제약산업의 R&D 현주소를 ‘변혁기’라고 진단한 그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보다 많은 의사과학자들이 산업현장에 합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젊은의사들이 ‘진료현장’만 고집하기 보다 진로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통해 ‘산업현장’으로도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의사과학자들이 바이오벤처 열풍에 동참하면서 우수 인재들이 산업현장에 유입됐지만 열악한 투자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진료현장으로 복귀했다.
경쟁력 높은 기술과 회사에 집중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나눠주기식 분산투자가 이뤄지다 보니 신약 개발이 탄력을 받을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김열홍 사장은 “국내 R&D 분위기가 침체되는 사이 중국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통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며 “글로벌 경쟁력 강화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특히 제약산업 R&D 경쟁력 확보 일환으로 기존 임상의사들은 물론 의대생이나 전공의들이 과감하게 산업계 진출을 모색해 보길 권했다.
그는 “35년 동안 의학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아쉬웠던 부분은 대부분의 후학들이 근시안적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이라며 “유연한 사고를 갖고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의대생과 전공의 상당수가 당장의 면허와 자격 취득에만 함몰돼 있다”며 “의사로서 의미있는 삶이 꼭 진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실제 김열홍 사장의 이러한 지론에 공감한 인력들의 합류도 이어지고 있다. 200명 남짓이던 유한양행 연구소 인력은 지난해 말 기준 417명으로 늘었다. 의사 출신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민족기업인 유한양행의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기술 도입 및 외부 투자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은 그는 우수한 연구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제약회사로의 도약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유한양행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는 2026년 글로벌 상위 50위 제약사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다.
그는 “적극적인 오픈 이노베이션과 우수한 연구인력 확충이 시너지를 발휘한다면 국내 제약산업의 R&D 경쟁력은 폭발할 것”이라며 “과감한 도전을 주저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