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도 남들처럼 주 5일 한 번 일해보자는 데 왜 그게 문제냐고….”
낮은 수가 체계 때문에 주 40시간, 주 5일 진료는 언감생심이라고 외치는 개원의들의 ‘아우성’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외면할 수도, 폄하할 수도 없는 문제”라며 “정부의 저수가 정책으로 주 6일 50시간 이상의 근무에 허덕이고 있다”고 쓴 소리를 내뱉었다.
“장시간 고강도 근무 지친 의사들 몸부림”
서울 영등포구에 개원을 한 A원장은 “현행 근로기준법이 주 40시간 근로를 기준하고 있어 공공기관과 금융기관 등 대다수 근로자들이 주 5일 40시간 근무를 하고 있음에도 유독 의료기관 종사자만은 같은 국민임에도 삶의 질은 완전 도외시되고 있는 것 같다”고 성토했다.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내과계는 20~40명 이내의 진료를 권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저수가 정책으로 의원급 의료기관의 경우 일평균 8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경영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A원장은 “의사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당연히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하루 세 시간 잔 의사와 충분히 숙면을 취한 의사, 당신이라면 어느 의사에게 수술 받고 싶은가”라며 자조섞인 목소리를 냈다.
서울 서초구 소재 B내과 원장도 “주 80~100시간씩 일해야 하는 전공의들의 과잉 업무 구조나 개업의들이 365일 병원 문을 닫지 못하는 등의 현상은 모두 지나치게 낮은 진료비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원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다수 동네의원들은 토요일 진료를 하고 있다. 물론, 주중 진료를 받지 못하는 직장인들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경영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적정 환자에 대해 적정 시간을 들여 진료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의사들 ‘살인적 근무환경’
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전임의들 근무여건은 더욱 열악하다. 이들은 주 80시간(혹은 100시간)을 초과하는 살인적인 근무환경에 처해있다.
사실상 수련 과정이라는 명분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전공의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논란이 돼 왔다.
전공의들의 주당 근무시간이 100시간을 넘는 등 근로환경 개선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실제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는 대한의학회에 ‘전문의제도 개선방안 연구'를 의뢰한 결과, 전체 전공의의 43%가 주당 근무시간이 100시간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법정 근로시간인 40시간의 2배가 넘는 수치다. 이로 인해 전공의 피로도 역시 평균점수는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인 36점을 훨씬 넘는 43.8%에 달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전공의들은 출산과 육아에 대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심각성을 더했다.
출산휴가는 출산한 여성 전공의의 58.2%가 30일 이하만 다녀왔고, 60일 이상 다녀왔다는 전공의는 1.9%에 불과했다. 수련병원에 전공의 출산휴가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전공의협의회 관계자는 “많은 전공의들이 열악한 근무여건 하에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교육보다 근로에 매진하고 있다”며 “피교육자인 동시에 근로자인 전공의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당장 환자 안전에 위협이 되는 만큼 정부가 나서서 여건을 개선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누리당 손인춘 의원은 “전공의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것은 의료서비스 질 저하는 물론 심지어 의료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전공의들의 수련환경 개선이 매우 절실하다”고 말했다.
대형병원 토요진료 속속 합류…“더 고달파지는 의사들”
삼성서울병원이 9월부터 모든 과를 오픈하는 ‘토요 진료’에 나서기로 했다. 현재 빅5 병원 중 토요진료를 실시하고 있는 곳은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 서울대병원 등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주5일제, 주40시간 제도가 정착됐지만 병원계 만큼은 예외인 것이다.
실제 서울대병원은 산부인과, 성형외과, 신장내과 등 18개과에서 토요 진료가 이뤄지고 있으며 세브란스병원과 서울성모병원은 전 진료과가 주말에 진료를 본다.
현재 주 5일 근무를 지키는 곳은 경북대병원, 경상대병원, 계명대동산병원, 고신대복음병원, 동아대병원, 부산대병원, 영남대병원, 원광대병원, 원주세브란스병원, 전남대병원, 충북대병원, 화순전남대병원 등이다.
하지만 의료진들은 갈수록 업무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여기에는 내적으로는 병상 수 확대 및 대형 병원 신축에 따른 경쟁이 더욱 심화되고 외적으로는 포괄수가제 확대, 선택 진료비 감소 등의 여파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대한병원협회 정영호 보험위원장은 “정부의 고강도 압박 정책이 계속되면서 병원들이 비상이다. 이에 따라 교육·연구·진료 모두 집중해야 하는 의사들은 그야말로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몰렸다”고 지적했다.
실제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아산병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형병원들이 적자를 냈다. 대형 종합병원들의 경영 적자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한 교수는 “그렇잖아도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한 병원 경영진들의 자구책이 쏟아지면서 의사들의 업무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면서 “진료 실적 압박에 인센티브 제도까지 삶이 고달파지는 의사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같은 맥락에서 일부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토요 진료를 바라보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외과 한 주임교수는 “과거 우리 병원 역시 주 5일제 이후 한시적으로 소수 과가 토요진료를 진료를 실시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환자 수가 많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적자가 누적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다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교수 역시 “토요진료가 실시되면 의사·간호사 등 의료진뿐만 아니라 많은 직원들이 근무를 해야 한다. 이들의 불만이 커질 수 있으며 인건비 때문에 병원 경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쏟아지는 수술… 골병 드는 간호사들
“수술량이 많다. 하루에 해결이 안될 만큼 수술이 잡혀 있다. 환자 당겨서 빨리 하고, 또 하고. 그럼 간호사는 엄청 일을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실제로 환자들 세팅이 길어지면 매우 문제가 된다. 시간이 안 맞으면 마취해 놓고 그냥 기다리게 한다. 수술시간이 맞지 않은 경우, 환자는 마취해놓고 펠로우(전임의)가 열어 두고 그렇게 기다리는 거다. 환자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
한 대학병원 간호사의 증언이다. 이처럼 업무 강도가 강해지면서 몸살을 앓고 있는 사람은 비단 의사 뿐만이 아니다.
실제 국내 간호사들의 업무강도가 타 국가 대비 최대 4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업무에 만족한다고 답한 간호사는 10명 중 3명에 불과했다.
김철웅 충남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최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병원인력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해 ‘간호사와 병원 직원이 보고하는 병원의료서비스 현황과 문제점’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김 교수가 79개 병원의 간호사, 직원 등 1만9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재 직업에 대해 불만족 한다고 응답한 간호사 비율은 한국이 68.5%로 독일(17.4%), 캐나다(32.9%) 등 비교 대상인 5개국보다 월등히 높았다. 5개국 중 가장 불만족도가 높은 미국(41%)보다도 27.5%포인트 앞섰다.
업무강도를 나타내는 ‘정서적 소진점수’가 표준(27점)보다 높은 간호사 비율은 한국이 70.4%로 최고를 기록했다. 독일(15.2%)보다 4배, 스코틀랜드(29.1%)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김 교수는 “한국의 의료 질을 높이기 위해선 병원 인력의 직무만족, 정서적 소진 등 핵심 변수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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